대학수학능력시험이 홍역을 앓고있다. 1994학년도 도입 이후 난이도 문제 때문에 계속 시끄럽긴 했지만 올해처럼 오답·기출문제 시비로 문항재검토를 실시하고 출제위원 관리에서 허점이 노출되는 등 총체적 위기에 처한 적은 없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학원강사 경력자가 출제위원에 포함된 과정을 자체 감사하고 있는 가운데 24일 언어영역 17번 문제에 대해 복수정답을 인정하기로 하자 파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곳곳에서 '차제에 수능 시스템을 대수술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현실적으로 당장 큰틀의 변화는 어렵더라도 7차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2005학년도 수능에 앞서 수술을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예고된 출제위원 관리 허점
학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해마다 수능 출제위원 명단이 학원가를 중심으로 나돌아 왔다. 출제위원 선발과정에서 비밀유지각서를 작성하는 등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지만 출제위원으로 선발된 대학 교수와 고교 교사가 '징발'돼 1개월간 합숙에 들어가는 시스템상 출제위원을 예상하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것. 수능출제위원장을 지낸 서울대 모 교수조차 "수능이 1개월 앞으로 다가왔을 때 어느 국문과 교수가 사라졌다면 그를 출제위원으로 찍을 수 있다"고 털어 놓았다. 올해도 수능이 다가오면서 각종 학원 사이트에는 출제위원과 관련한 정보를 주고 받은 글들이 수없이 올라왔다.
지금까지 이런 정보들은 소문으로 왔다 사라졌지만 올해는 달랐다. 학원가를 중심으로 출제가능성이 떠돌던 '칸트 지문'과 '백석 수필' 등이 실제 문항에 포함됐고 급기야 모 학원 강사 경력자가 출제위원에 포함된 사실이 드러난 것. 이를 두고 유명학원 강사 A씨는 "문제의 강사가 출제위원에 포함된 걸 알고 강사의 전공인 칸트 지문을 예상문제로 찍은 학원이 1, 2곳이 아니다"라며 "수능 출제시스템상 충분히 예견했던 사태"라고 말했다.
초유의 문항재검토
올해는 유달리 오답과 기출지문 시비도 많았다. 예년에도 1, 2문제가 논란에 휘말리기는 했지만 올해는 무려 5, 6문제에 대해 시비가 붙었다. 언어영역에서 1문제, 사회탐구에서 2문제, 과학탐구에서 1문제, 영어에서 지문 2개에 대해 오답가능성과 기출지문이라는 지적이 강하게 제기됐다. 마침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언어영역에서 오답 시비가 일고있는 문항에 대해 비출제위원 전문가들로 구성된 학회에 재검토를 의뢰, 복수정답을 인정했다.
외국어영역에서는 기출지문 시비가 불거졌다. 짝수형 38번 문제 지문과 49, 50번 문제 지문 등 2개가 서울 N출판사에서 발행한 모의고사 문제지에 나온 지문과 거의 유사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는데 "실제로 문제의 지문들은 같은 원전에서 나왔다"고 평가원측이 밝혔다. 평가원측은 "우연히 원전이 일치했지만 수능 출제지문은 원전을 많이 개작해 요지 외에는 상당부분 바뀌었기 때문에 시비의 소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평가원 관계자는 "기출문제 시비를 없애기 위해 출제과정에서 시중 문제지나 국내에 나온 책자들을 배제하다 보니 원전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원전을 각색·개작해 출제지문으로 사용한다"고 털어놓아 앞으로도 기출문제 시비가 계속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해결방안은 없나
어느 때보다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낸 수능을 두고 '이대로는 안된다. 바꿔보자'는 의견이 속출하고 있다.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출제방식과 수능의 성격에 메스를 대야 한다는 지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출제방식은 지금의 '출제위원을 감금하는 형태'에서 연중 시험문항을 개발하는 '문제은행 시스템'으로 바꾸고 수능의 성격은 자격고사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연 6회 가량 시험을 치르는 미국의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을 염두에 둔 제안들이다. 이번 정부 들어서도 이런 대안은 꾸준히 거론돼 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공약에서 '문제은행'을 거론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는 '수능의 졸업자격고사화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낸 바 있다.
그러나 교육부는 선뜻 나서지 않고있다. 윤덕홍 교육부총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능이) 자격 고사화하면 대학들이 대학별 고사를 치르려고 할 테고 그러면 다시 과외문제가 불거질 것이기 때문에 쉽사리 수능 체계를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문제은행식으로 바꾸기 위해 문제은행 풀(pool)을 구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수시 시험에 따르는 난이도 조정의 어려움 등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7차 교육과정에 따라 선택형 시험으로 치러지는 2005학년도 수능은 대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 양승실 대입제도연구팀장은 "내년 수능에는 선택과목이 늘어 올해보다 3배나 많은 출제위원이 필요해지는데 여전히 감금식 출제방식을 고집한다면 곳곳에서 출제위원이 노출돼 수능대란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 전문가들의 수능개선안
전문가들은 현행 대학수학능력시험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출제위원 감금 방식'을 들었다. 이를 문제은행식으로 바꾸지 않고는 출제위원 자격시비와 오답 및 난이도 논란 등을 잠재울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국교육개발원(KEDI) 양승실 대입제도연구팀장은 "출제위원을 감금해야 모두가 안심할 수 있는 우리는 가장 원시적인 신뢰의 사회에 살고있는 셈"이라며 "구습을 버리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대부분 국가들이 선택하고 있는 문제은행식 출제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이현청 사무총장도 "수능을 존속시키는 문제부터 먼저 논의돼야 하지만 수능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감금식 출제는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은행 방식으로 바꾸면 연중 수시로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 한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좌우되는 수능의 폐해는 그동안 누누이 지적돼 오던 터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추가논의가 필요하다. 일부에서는 시험을 여러 번 치르는 것이 수험생에게 큰 도움이 안되고 도리어 시험의 노예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KEDI 양 팀장은 "대부분 수험생이 주어지는 시험 기회를 모두 이용하려 할 것이 뻔해 시험과열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시험을 여러 번 보는데 대해서는 수험생이 우선 부정적이라는 설문결과도 있다.
수능을 자격고사로 전환하자는 주장도 자주 제기되고 있다. 대입전형에서 수능 비중을 줄여 수능 과외 등의 병폐를 없애고 다른 전형요소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또 자격고사 논의는 현재 수능이 최소한의 대학 수학능력을 측정하는 적성검사인지 선발의 기준으로 사용되는 학력고사인지 정체가 애매하다는 지적의 연정선상에 놓여있다. 서울대 백순근(교육학) 교수는 "국가시험인 수능은 기초공통 과목을 대상으로 학교에서 배운 수준이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시험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수능의 비중이 낮아질 경우 고교 내신 부풀리기와 대학 본고사의 부활 등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또 고교졸업생에 비해 대입정원이 크게 늘어나 별도의 자격고사는 필요없다는 주장도 있다.
/김정곤기자
■ 2005 수능 변화와 문제점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올해보다 훨씬 출제관리가 어려울 전망이다.
2005학년도 수능은 7차 교육과정이 적용돼 수험생이 응시 영역과 과목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교과목이 대폭 늘어난다. 여기에 실업계 학생들을 위해 직업탐구 영역도 신설된다. 이에 따라 응시과목이 현재 18개에서 50개정도로 약 3배가 증가하게 된다.
현재 수능은 언어, 외국어(영어), 수리, 과학탐구 4과목, 사회탐구 5과목, 제2외국어 6과목 등 총 18개 과목. 하지만 2005학년도에는 언어, 외국어, 수리I·II, 선택과목 3개, 사회탐구 11과목, 과학탐구 8과목, 직업탐구 17과목, 제2외국어 및 한문 8과목 등 총 50개 과목이 출제된다.
이에 따라 올해 150명 선이었던 출제위원 수가 최소 500명 선으로 대폭 늘어날 수밖에 없어 출제위원 선정이나 보안이 훨씬 어려워진다. 교육 당국에서도 "그렇지 않아도 출제위원을 구하기가 어려운 판에 500명이나 되는 인원을 어떻게 구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특히 2005학년도 수능에 추가되는 직업탐구 영역이나 제2외국어의 아랍어 같은 과목은 출제위원 풀이 훨씬 적다. 따라서 웬만하면 출제위원을 파악할 수 있게 돼 출제위원 명단 유출 시비나 예상문제 출제 시비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교육 전문가들은 "150명 정도의 출제위원을 관리하는 것도 어려운데 500명 가까운 출제위원을 섭외해 한곳에 모아놓고 관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다 선택과목이 너무 많아 수험 당일 학생들의 고사장배치를 비롯, 답안지 수거나 채점과정도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일선 고교에서 이렇게 많은 시험과목을 일일이 수업할 수 없기 때문에 학원에 대한 의존도는 훨씬 높아진다.
이와 관련,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12월 4일 경기지역 학생을 대상으로 2005학년도 수능과 똑 같은 방식으로 모의시험을 실시키로 했다. 평가원측은 "모의시험을 통해 문제점이 발견되면 이를 반영하겠다"는 입장이다.
/조재우기자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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