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 내 어머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 내 어머니

입력
2003.11.25 00:00
0 0

어머니, 저예요. 막내딸 정자. 이렇게 시든 꽃처럼 아무 힘도 없는 편지만을 쓰기보다 얼굴을 뵙고 싶지만 이젠 하늘 나라로 떠나셔서 그럴 수 없네요. 기억 나세요? 1992년 문화부가 제정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받으시던 날 말이에요. "내가 무얼 했다고 어미가 자식 기르는 도리야 세상이 다 하는 일인데. 내겐 송구하고 과분하구나" 하시며 수줍어 하시던 모습이 선해요. 시상식이 있던 날 어머니는 평소 제일 좋아하시는 연옥색 치마저고리를 얌전히 차려 입으셨죠. 살짝 동백 기름을 바른 백발이 얼마나 단아해 보였던지 저는 가슴이 다 뛰었어요. 이 세상에 어느 미인이 우리 어머니만 할까 하고요.어머니는 서른 일곱에 혼자 되셨어요. 세상을 상대로 맞서보지 못한 어머니에게 3대 독자인 상호 오빠와 상임, 상옥, 상애 언니, 그리고 막내인 저까지 자식 다섯을 남기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죠. 인천 소래 포구에서 양조장을 경영하시던 아버지가 광복 직후 열병이 걸려 돌아가신 게 제 나이 네 살 때의 일인데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시던 어머니를 두고 친척들은 '젊은 여자가 얼마나 독하면 남편을 묻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느냐'고 흉을 잡았다지요. 하지만 눈물은 어머니에게 사치였다는 걸 전 알아요. 자식이 다섯이나 있었으니까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뒤 어머닌 사업가가 되셨어요. 거의 전투적이었죠. 저희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오셔서 직물공장을 운영하셨죠. 지금 용산 경찰서 길 건너 자리에 있던 직물 공장과 이층 양옥집이 기억에 선해요.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에서 우리는 늘 그리움 때문에 안방에 걸린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어머니 냄새를 맡곤 했지요.

6·25가 터지면서 어머니는 더욱 강인해지셨어요. 3대 독자 아들 하나를 인민군으로부터 지키시느라 뒷산 토굴로 몰래 몰래 밥을 지어 나르시던 어머니는 극단 신협에 몸 담고 있던 오빠가 군예대에 입대한 후 홀몸으로 강화도에서 제주까지 어린 네 딸을 끌고 피난살이를 하셔야 했죠. 난리통에 어머니는 천리만리 제주도에서 목포로 옷감이며 식료, 잡화를 머리에 이고 날라 파셨어요. 뱃길이 끊겨 장사를 하시지 못하자 마지막 남은 비취 비녀를 뽑아 파시던 걸 기억해요.

동글동글한 어머니 얼굴엔 유난히 쪽 진 머리가 잘 어울리셨지요. 경대 앞에 다소곳이 앉아 정성 들여 기름 발라 참빗으로 훑어내고 민빗으로 고루 다듬어 세 갈래로 나눠 땋은 머리에 자주색 갑사 댕기를 들이고 조심스레 쪽을 지어 파란 비녀를 꽂는 모습을 전 언제나 취한 듯 가슴 울렁거리며 바라보곤 했어요. 그런데 제가 시집가던 해에 어머니는 쪽 진 머리를 자르시고 커트를 치시더군요. 주위에선 모두 반대했지만 서른 한 해 동안 아버지 없이 키워온 막내딸을 떠나 보내며 어머니는 미련 없이 머리를 자르셨어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그건 딸을 시집 보내는 것으로 어미로서의 부채와 한을 마무리하는 일종의 제의같은 것이었음을. "이제 누가 날 보아 주겠니?" 머리를 자르시고도 어머니는 담담하시기만 하셨어요.

저는 무대 위에서 어머니 흉내를 많이 내요. 사람들은 내 연극을 보고 울고, 웃고 또 박수를 보내지만 알고 보면 어머니의 몸짓을 연극 속에 표현했을 뿐인 걸요. 저는 어머니의 감수성과 서정, 그리고 집요함의 분량을 알아요. 저는 그저 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가 지닌 재능의 작은 한 부분, 동물적 후각과 목소리를 얻었지요. 슬플 때 슬퍼할 줄 알고, 기쁠 때 기뻐할 줄 아는 '재능'까지 덤으로요. 저 말고 어머니가 연극 배우를 하셨더라면 훨씬 나았을 게 분명해요.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저는 '굿나잇 마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그 여자 억척어멈' 같이 어머니 역이 참 많았어요.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인 현실에서는 미달인 걸요. 엄마라는 배역이 이렇게 힘든 건 줄 알았다면 맡지 말 걸 하는 철없는 생각도 자주 할 만큼 말이에요. 팔십의 나이에도 딸이 공연하느라 힘들까 봐 경동 시장에서 한약을 손수 지어다 주셨던 어머니. 자식을 하나의 신앙처럼 여겼던 어머니. 어머니가 제게 해주셨던 작은 한 부분이라도 아이들에게 할 수 있다면 아마 성공했다고 저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 텐데요. 육십을 넘긴 나이에도 어머니의 빈자리는 여전히 커요. 나의 고향, 나의 무덤 속 같은 어머니. 당신께서 계시지 않는 지금 저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고아나 마찬가지랍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