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브이' 전시회가 열리고 '우주소년 아톰'이 TV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터넷 헌책 마니아를 들뜨게 했던 그 작품 '출동 먹통―X'가 독자들의 선주문 요청에 따라 부활했다. 태권브이는 국내 최초의 탑승형 로봇이고, 아톰은 일본 최초의 가족형 로봇이다. 유명세만큼이나 스토리가 탄탄한 두 작품은 수많은 아류작을 낳으면서 스스로 거대한 장르의 법칙을 탄생시켰다. 아쉬운 대목은 한국산 태권브이의 메카닉 설정이 일본산 슈퍼로봇계의 위대한 스타 마징가Z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처럼 당시 한국의 소년들은 일본의 황국사관과 군국주의가 묻어나는 사무라이 또는 가미가제 로봇이야기를 우리의 호국정신으로 이해하며 '중독적 사랑'을 보냈다.로봇이야기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박사와 연구소, 소년과 로봇, 외계의 적과 지구 방위대, 더 강한 적과 필살의 기술 등이다. 가령 적이 지구를 침략하면 지구방위대가 나서지만 곧 전멸당하고 이를 알게 된 박사가 자신의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제작한 로봇에 소년을 태워 적과 맞서게 한다. 소년은 어렵게 적을 물리치지만 더 강한 적이 등장하고 급기야 비장의 '필살기'를 쓰게 된다. 로봇장르 작품에서 비롯한 이야기 구조의 법칙은 수많은 로봇 소재 작품에서 반복 사용됐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로봇장르의 관습으로 굳어졌고 관습은 곧 장르의 죽음을 불렀다.
고병규의 1994년 발표작 '출동 먹통―X'는 멸종된 로봇장르를 복원한 작품이다. 물론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심각함을 찾아 볼 수 없는 전형적 SF 패러디물이다. 가령 연구소 앞 수영장에 감춰진 로봇이 물살을 가르며 출동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로봇이 녹이 슬어 움직일 수가 없다. 또 지구방위대가 적에게 패한 뒤 주인공이 등장해야 하는데 지구방위대는 도무지 패할 기색이 아니다. 적 기지를 폭파하기 위해 시한폭탄을 설치했는데 폭파음 대신 정겨운 알람 소리가 울린다. 로봇장르가 관습적으로 보여준 소품을 가볍게 비틀어 버린 것이다.
이보다 조금 깊이 들어가면 로봇장르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태권브이의 조종사 훈은 절대 절명의 위기마다 '3번 키'를 누른다. 3번 키는 태권브이가 훈의 태권도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는 명령어로 최후의 필살기이고, '3번 키를 눌러라!'는 대사는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유일무이한 유행어이다. 그러나 3번 키만 누르면 적을 이길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설정 때문에 한국 애니메이션을 비하하는 용어로도 사용됐다. 이 작품에서는 3번 키를 'Y 버튼을 눌러라!'로 패러디한다. 일본산 애니메이션에 대한 떨떠름한 추억과 로봇장르의 멸종에 대한 나름의 해법인 셈이고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추억 상품인 셈이다. 추억은 확인하지 않는 것이 더 값진 기록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걸작은 늘 새롭게 해석되고 다시 추억되는 것이다.
/박석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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