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터 옛 경기여고 자리의 미 대사관 신축 논란과 관련, 미 대사관 측이 새 청사로 쓸 빌딩 매입을 위한 비밀 접촉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덕수궁 터 미 대사관 신축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미 대사관이 최근 이 터에 인접한 18층짜리 건물을 사려고 건물주와 접촉했음을 확인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미 대사관이 경기여고 터의 일부인 585평을 외교 공관 보안구역 확보용으로 서울시에 요구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 빌딩은 현재 70% 가량 공정이 진행됐으나 분양이 안돼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미 대사관 측의 이런 움직임은 덕수궁 터 미 대사관의 신축 가능 여부를 판단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가 28일로 임박한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무엇이 문제인가
문제의 미 대사관 신축 예정지는 조선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초상화)을 모신 선원전, 역대 왕과 왕비의 혼백과 시신을 모신 흥복전·흥덕전 등이 있던 궁궐 내 신성 구역임이 최근 연합조사단(문화재보호재단·중앙문화재연구원)의 문화유적 지표조사(6∼11월) 결과 밝혀졌다. 연합조사단은 문헌조사로 이를 확인하고 실제 현장조사에서 옛 덕수궁의 건축부재로 추정되는 석재를 비롯해 문 터, 기와·도기·자기 파편 등을 발견, "궁궐터임이 확실하므로 보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문화재보호구역을 개발할 때는 먼저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거치고 그 결과를 문화재위원회가 심의, 보전해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이번 사안은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가 심의할 사항이지만, 덕수궁 터를 관할하는 서울시가 아직까지 지표조사 결과를 문화재청에 보고하지 않은 상태여서 28일 심의에 상정되지 않고 검토가 미뤄질 가능성도 있다.
경기여고 터는 1986년 한미 재산교환 양해각서에 따라 미국 소유가 됐다. 당시 을지로에 있던 미 문화원, 광화문의 미 대사관, 한국일보 맞은편 미 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와 맞바꾼 것. 미국은 여기에 2006년까지 지상 15층 지하 2층 규모의 새 대사관을 짓고 직원 아파트와 군인 숙소도 함께 지을 예정이었으나, 문화재 훼손이라는 국내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있는 상태다. 어떻게 풀 것인가
32개 단체로 이뤄진 '덕수궁 터 미 대사관·아파트 신축 반대 시민모임'은 덕수궁 터인 경기여고 자리를 미국에 내준 것은 우리 정부의 실수라고 지적하면서, 정부는 미국 측에 사과하고 서울시는 대체부지를 제공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또 덕수궁 터를 사적지로 지정, 복원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측은 양보와 압박의 양면 카드를 활용하고 있다. 미국 측의 강수(强手)는 이 문제를 용산 미군기지 이전 협상과 연계하는 것. 17일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미군 측은 덕수궁 터의 건물 신축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8만 평에 이르는 기지 내 미 대사관 숙소와 부대시설 용지를 반환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 합의에 실패했다. 이에 앞서 토머스 허바드 주한 미 대사는 경기여고 터가 안 되면 도심의 다른 땅에 지을 수도 있음을 시사(10월 29일 연합뉴스 인터뷰)했다. 그러나 경기여고 터 1만 3,200평과 교환할 땅을 서울 도심에서 찾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이런 사정 때문에 허바드 대사는 14일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나 경기여고 터에 대사관만이라도 신축할 수 있게 협조해 달라고 요청, 정부가 이를 검토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우리 정부와 서울시가 대답할 차례인데도 정부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대안을 모색하는 한편 강수를 던져 줄다리기를 하는 미국 측의 적극적 움직임에 비하면 소극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울시는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가 신축 불가로 날 경우에 대비해 대체부지를 물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 대사관이 덕수궁 터 청사 신축을 포기하고 대체 건물을 매입할 경우, 그 비용을 우리 측이 지불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경기여고 터 일부를 외교공관 보안구역으로 내주는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미 대사관이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진 585평도 덕수궁 터에 속하기 때문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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