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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1> 내 진통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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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1> 내 진통은 끝나지 않는다

입력
2003.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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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예순 둘이지만 삶에 있어서 아직도 아마추어 티를 벗지 못했다. 무대 밖에만 서면 내 자신이 꼭 세상에 첫 발을 떼어 놓은 어린 아이처럼 느껴진다. 모르는 것 투성이고 매사에 서툴다. 계산은 어렸을 적부터 질색인 데다 기계치여서 컴퓨터도 쓸 줄 모른다. 요리도 영 자신이 없다. 백화점이나 면세점에 가면 무얼 사야 할지 몰라 쩔쩔 맨다. 화장품이래야 로션이나 립스틱 몇 개를 사본 게 고작이고 음반 가게에서 좋아하는 CD 한 장 내 손으로 자신 있게 골라 본 적이 없으니 더 말해 무얼 할까. 운전면허를 따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그저 신기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능함은 나를 괴롭혔고 또 실망시켰다. 아이가 대학 원서를 낼 때조차 나는 부모로서 아무런 참견도 못했다. 그저 딸 아이가 상의를 해오면 "그래? 그 과 참 재미있겠다"고 철없는 소리만 할 뿐이었다.그러나 나는 결단코 똑똑해지고 싶지 않다. 만약 내가 이렇게 위태롭고 허술하지 않았다면 연극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꽉 차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인물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을 테니까. 지혜로운 생활인으로 사는 걸 포기하고 연극과의 연애에 빠져 보낸 40년 세월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아니 후회할 틈조차 없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겠다. 내겐 그 시간이 연극배우로 살기에도 너무 벅차고 짧았다. 아들과 딸이 고3 수험생이던 시절에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그 순간에도, 부부 생활의 위기를 겪고 있을 때도 나는 배우로서 무대에 올랐다. 돌이켜 보면 바보처럼 이 세상에 연극 말고는 다른 훌륭하고 그럴 듯한 일이 없다고 믿어 왔던 듯 싶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마음껏 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극 속에서 내가 잃어 버렸다고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의 이미지를 다 찾았다. 무대 위에서 나는 억겁의 시간을 살았고 수많은 인간 존재를 가슴으로 껴안았다. 돌이켜 보면 문뜩 내 자신도 놀랄 때가 있다. 배우란 얼마나 멋진 직업인가? 배역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 딸 하나를 둔 내가 갑자기 딸을 열둘이나 둔 딸 부자가 될 수도 있으니 놀라운 연금술 아닌가? 아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귀족, 따라지, 왕비, 광대, 수녀원장, 자식의 죽음 앞에 목메어 우는 어머니, 팔십의 나이에 열 아홉 청년과 사랑에 빠지는 여인으로 살았다. 아주 오래된 영화처럼 무대에 섰던 기억들이 머리 속에 하나 둘 스쳐 지나갈 때마다 조용히 그 시간들을 자축한다.

나는 바로 어제까지 신촌에 있는 산울림 소극장에서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공연했다. 1991년 첫 공연 당시 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장장 8개월 동안 공연한 작품이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초연한 91년은 실제로 내 나이가 오십 살이 되던 해였다. 공연을 시작할 즈음 내내 오른 쪽 팔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밤잠을 설치며 운 때도 있었다. 오십년 세월의 무게가 그렇게도 아팠던 모양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2년이 지나 다시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공연 하려하자 왼쪽 팔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연습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에 병원 출입까지 해야 하는 황당한 분주함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도 막은 올랐다. 포스터에 새겨진 개막 날짜는 잉크로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삐죽이 솟아오른 왼쪽 어깨의 통증은 인생의 0순위인 관객들과 만난 순간 살아있다는 고마움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때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극작가 새무얼 베케트의 '여자는 무덤에 걸터앉아 산고를 겪는다'는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나는 내가 맡았던 수많은 역할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산고의 아픔을 겪었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내 진통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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