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선 철길에서 경전선이 갈라지는 분기점이 경남 밀양시 외곽 삼랑진이다. 애초 일제가 시 한복판에 분기역을 두려던 것을 유림들이 호통을 쳐 밀어냈다는 것인데, '교통이 번다하면 장돌뱅이가 꼬여 풍속이 어지러워지고 글 공부에 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선 성리학적 가치를 최고로 치는 유림의 입김은, 그 때만 할까마는 아직도 건재해, 골골마다 틀고 앉은 적지않은 반가 집성촌의 위세가 이를 대변한다. 그 보수적인 도시 밀양에 '연극촌'이 선 것이 만 4년 전이다. 거기에 내년에는 '영화촌'이 선다. 조만간 '노래촌'까지 들어설 참이라고 했다. 그런데 조용하다. 반촌(班村)을 광대촌 만들자는 것이냐며 시비하는 이가 있을 법도 한데 시비 비슷한 군말조차 없다. 밀양은 그렇게 변했고, 또 변하고 있었다.
1999년 9월 부북면 월산리 월산초등학교가 문을 닫자, 기다렸다는 듯 차고앉은 게 극단 '연희단 거리패'였다. 이상조 밀양 시장의 제안을 밀양 출신 연극인 손숙씨가 다리를 놓고, 대본 쓰고 연출하는 이윤택씨가 선뜻 단원 40여 명을 몰아 든 것. 고속도로 하나 스치지 않는 외진 골, 앞산 달 뜨면 '팔광(八光) 화투 패' 못잖아 월산(月山)이라는 그 마을 풍광에 반해 서울을 버리고 내려간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저 (연극)시장과 얼마간 거리를 두고, 마음 맞는 이들이 또 하나의 집성촌을 이뤄 연극을 삶처럼, 삶을 연극처럼 살아보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단원들은 4년 동안 교사에서 숙식하며 연습했다. 수시로 전국 순회공연을 하면서도 매 주말 연극촌 공연을 건너뛴 적이 없었고, 2000년부터 매년 여름 연극축제를 열었다.
세계 어디에도 유래없는 이들의 열정에 밀양연극촌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명성으로 뿌리를 내렸다. 작품의 밀도와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자평처럼 연극적으로도 성공한 셈이고, 적자 안보면 성공이라는 연극판에서 단원 월급 밀린 적 없고 얼마간의 돈도 비축하는 살림이라니 상업적으로도 자리를 잡은 셈이다. 지난 여름 연극축제 때는 관객들이 연일 학교 앞 국도에 장사진을 쳤고, 두세 시간씩 기다려 표를 구한 뒤에도 비집고 설 자리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공연장도 허술하고 잠자리며 먹거리며 씻는 것조차 불편한 데도 말이다. 한 주민은 "내 나고 첨이다. 밀양 생기고 그런 일은 없었을 끼다"고 했다.
그 사이 주민들이 달라졌다. 학교를 끼고 앉은 월산리, 가산리, 퇴로리 등은 전형적인 농촌마을. 평생 연극은 커녕 잠에 쫓겨 TV 연속극도 호사로 치는 이들이었지만, 이제 연극촌 공연에 관한 한 어지간한 레퍼토리와 줄거리를 꿰고 산다. 대중성 강한 작품이 주로 공연되는 까닭도 있지만, 마을에서 얼굴 맞대고 사는 인사성 밝은 젊은이들이 하는 연극이니 더 정이 가는 것일 게다. "그 뭣이고? '산너머 개똥아' 그거 함 더해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그것도 잘됐다 카데. 또 운제 하노." 이제는 숫제 공연 일정까지 참견하려 드는 이들도 있고, 타 지방 공연까지 따라오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삐걱대기도 했다. 가극 연습하느라 새벽녘까지 확성기를 틀었다가 '이 놈들아, 지금 몇시고, 잠 좀 자자' '노래를 부릴라 카모 좀 잘 불러라' 식의 항의도 들었다. 또 한 번은 '도솔가' 홍보물 촬영차 남자 배우들이 발가벗고 포즈를 취했는데 멀찍이서 주민들이 그 광경을 보게 된 것. '풍기문란이다' '항의를 해야 한다'는 편과, '예술이다' '더러 그런다더라'는 편이 나뉘어 마을 앞 가게에서 설전을 폈다는 후문. "이제는 단원들과 마을 분들이 흉허물없이 어울리는 터라 그런 마찰도 옛 일이 됐습니다." 왕고참 단원 조영진(42)씨의 조심스런 말에 곁에 섰던 한 주민이 거든다. "맞다. 인자는 딴 데 공연 가삐고 학교가 조용하믄 오히려 허전한기라." 65세 이상(초기엔 60세 이상) 공짜 손님들은 더러 고추며 감이며 사과 등 농산물을 슬쩍 놓고 가는 것으로 인사를 챙긴다.
수삼년째 활동을 않던 밀양연극협회 회원들이 연극촌의 도움으로 활동을 재개했고, 의상 음악 무대 등을 지원받은 지역 무용단체가 올해 사상 처음 도 대표로 선발돼 전국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단골 관객 송재환(41·약사)씨의 딸 미리(밀양초5)는 연극촌에서 배운 가락으로 친구들과 연극동아리를 결성, 직접 대본 쓰고 연기하고 연출한 작품을 학예회에 올릴 참이다. 송씨는 "극장 세 곳 가운데 두 곳이 문을 닫은 밀양이지만, 연극촌과 연극은 이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출범 초기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 당국은 도 예산 등 25억원을 들여 연극촌 공연시설을 완전히 손볼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주민들의 의외의 호응에 시의 행보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최근 폐교한 하남읍 명내초등학교를 내주고 '밀양영화촌'을 유치했다. 부산지역 영화인들이 주축이 돼 연출 연기 등 5개학과 4년제 영화학교(비인가)를 여는 것인데, 당장 내년 3월 문을 연다. 영화촌은 교육은 물론이고, 야외극장을 운영하고 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연극촌 운영모델을 이어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또 밀양 출신 작곡가 정풍송씨 등을 초빙, '꾀꼬리 노래학교'를 열 궁리도 하고 있다. 꾀꼬리학교는 대중가요 뿐 아니라 성악, 판소리 등을 아우르는 소리 문화의 장이 될 것이라는 설명. 이렇게 되면 97년 문을 연 미술·조각 중심의 가인예술촌과 98년 개원한 미리벌 민속박물관을 포함, 음악 미술 연극 영화를 망라한 문화예술타운이 되는 셈. 궁극적으로는 예술종합대학도 유치한다는 포부다. 이 시장은 "수숫대 움막도 불을 켜서 꾸미면 그기 예술"이라고 했다. 출발은 허술해도 열정이 있는 만큼, 차근차근 하다 보면 될 것이라는 의지다. 밀양시는 이제 각기 다른 예술 부락들이 모여 조화하면서 발전하는 도시로 변하고 있다.
/밀양=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내 評한마디로 관객몰이" 연극촌입구 구멍가게 설원주씨
가산리 토박이 설원주(73·사진) 씨. 밀양연극촌 들머리에서 30년 넘게 간판 없는 구멍가게를 열고 있는 그는 연극촌 공연을 가장 많이 본 관객으로 꼽힌다. 안 본 레퍼토리가 없고, 웬만한 작품은 서너 차례씩 섭렵했다는 그는 매주 말 공연도 "몇 번 안 빠졌을 끼다"고 했다. 신파나 가극풍의 작품이 오를라치면 가게를 대신 지키며 아내까지 채근해 보낸다.
그의 가게는 동네 사랑방이다. 농사일 틈틈이 주민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사방 팔방의 소리 소문들이 엉키고 풀린다. 공연을 가장 먼저 보고, 가장 많이 보는 그의 연극평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번 공연은 작품도 잘됐고, 아∼들이 하기도 잘하더라." 이런 평이 나오면 동네 사람들은 열 일을 제쳐둘 태세로 다음 공연을 기다린다. 초기 연극촌을 둘러싼 어지간한 불평도 그의 선에서 해소됐을 것이라는 추정. "뭘 뚜디리 대고, 좀 시끄럽다 싶제? 그라모 인자 촌 사람들이 뭐 있는가 싶어서 더 모인다." 그는 주민들의 연극촌에 대한 애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연극촌 예술총감독인 이윤택씨가 감독하고, 단원들이 출연하는 영화 '오구(11월28일 개봉)'를 촬영할 때의 일. "인근 시·군에서 촬영하고 나면 '길 막혀 장사 못했으니 보상하라'며 더러 상인들이 반발을 합디다. 하지만 전체 촬영의 70%를 해 낸 밀양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어요." 한 식구 일에 계산을 챙기는 건 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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