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등 지음 생각의나무 발행·29,500원
퇴계 이황(1501∼1570)은 섣달 초순 숨을 거둘 때 자신이 기르던 분매(盆梅)를 바라보며 "물을 주라"고 했다.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 등으로 부르며 사랑했던 그의 유언이다.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중 으뜸으로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 세한삼우(歲寒三友)인 매화. 그 중에서도 눈 속에서 홀로 피는 한매(寒梅), 또는 설중매(雪中梅)는 조선의 선비는 물론 중국의 사대부, 일본의 무사에게 지조와 절개, 강인하고 깨끗한 기품의 상징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매화는 중국 광둥(廣東)성과 쓰촨(四川)성 일대가 원산지로 한국에는 1,500여년 전, 일본에는 7, 8세기 한국 또는 견당사(遣唐使)를 통해 전래됐다.
조선시대에 매화는 꽃중의 꽃이었다. 중국에서는 모란에 눌리고, 일본에서는 벚꽃 다음이었지만 한반도에서만큼은 선비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세종 때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로 불리던 강희안은 화목(花木)도 관작처럼 정1품에서 정9품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매화, 국화, 연꽃을 첫번째로 꼽았다. 높은 품격과 뛰어난 운치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매화를 칭송하는 100여수의 시를 남긴 퇴계는 매화를 신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막고산 신선님이 눈 내린 마을에 와/형체를 단련하여 매화 넋이 되었구려/바람 맞고 눈에 씻겨 참 모습 나타나니/옥빛이 천연스레 속세를 뛰어넘네…' 이쯤 되면 매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존경과 신비의 대상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추위에 굴하지 않는 매화는 청빈하게 살아가는 깐깐한 선비의 자세, 눈 속에서도 몰래 풍기는 매화향기는 군자의 덕으로 통했다. 또 얼어서 죽더라도 반드시 늦은 겨울이나 이른 봄에 피는 강건한 특성은 정숙한 기품을 지니거나,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정절을 지키는 여인에 비유되기도 했다. 때문에 여인들의 장식품, 장신구에는 매화가 새겨졌다.
중국에서 매화는 당대(唐代)부터 '꽃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모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사대부의 학식을 상징했다. 진(晋)나라 무제가 공부할 때 글을 열심히 읽으면 매화나무에 꽃이 피고, 책 읽기를 게을리 하면 꽃이 시들었다는 고사에서 생긴 상징이다. 그래서 매화를 호문목(好文木)이라고도 불렀다. 매화촌이라 하면 매화가 핀 마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학식과 문덕이 높은 고결한 선비가 살고 있는 마을을 뜻한다. 장원급제한 선비의 모자에 두르는 장원화로 매화가 뽑힌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과거제도가 없었던 일본에서도 매화는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의 분신으로 여겨졌다. 또 인간의 신의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무사의 정신과 일치한다고 보아 무사계급은 매화 문장(紋章)을 앞 다퉈 가문(家紋)으로 삼았다. 하지만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에 이르러 은둔성이나 끈질긴 내한성, 내면적 고고함을 지닌 매화보다는 화려하게 피고 장엄하게 지는 벚꽃의 아름다움을 높이 치게 된다.
매화의 열매는 약용·식용으로도 유용하게 쓰였다. 중국에서는 5,200년 전부터 매실식초 등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매실을 삭혀 매실액을 만든 다음 물에 타서 마시면 피로회복과 배탈, 설사에 좋다. 일본에서는 나라(奈良) 시대부터 매실을 소금에 절인 우메보시(梅干)를 먹기 시작했다. 도시락 안에 넣어둔 우메보시는 반찬이기도 했지만 여름철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는 방부제 역할도 했다.
'매화'는 동북아의 문화적 이해를 위해 기획된 '한·중·일 문화코드 읽기' 시리즈의 첫번째 책이다. 3개국에서 매화가 갖는 상징성과 이미지를 통해 3국의 종교, 문학, 회화, 생활풍속에 스며 든 문화인자를 해독하고 그 지도를 만든 첫 성과인 셈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책임편집을 맡았고, 정양모 전국립중앙박물관장, 이상희 전 내무부장관, 이동환·심경호 고려대 교수, 가미가이토 겐이치(上垣外憲一) 일본 데즈카야마가쿠엔(帝塚山學園)대 교수 등 21명이 집필했다.
3개국의 학자들이 참여해 문화관련 상징과 이미지를 표제어로 삼아 발간하는 사전형 개념의 백과사전으로 나오고 외국에도 번역·출간될 계획이다. 매화에 이어 난(蘭), 국(菊), 죽(竹), 십이간지(十二干支) 등이 주제로 잡혀있다. 이어령 전 장관은 "동북아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 동질성과 특성을 찾아야 할 문명사적 소명이 있다"며 "일국 중심의 패권이나 이념화를 통하지 않고 중립적 입장에서 접근하기 위해 구체적 대상물의 상징과 이미지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그 공통점과 차이를 밝혀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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