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남을 돕고자 하는 뜻이 없는 자는 가장 악질적인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배우였던 봅 호프의 말이다.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사회의 어두운 곳을 돌아보자는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한해 동안 무심하게 살다가 연말 분위기에 휩쓸려 지갑의 일부를 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많은 이들은 한결같이 "작은 계기로 우연히 시작한 일이 습관으로 굳어졌다"고 말한다. '돈 때문에…'를 내세운 살벌한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각박한 세상. 그러나 조금만 신경 써서 주위를 둘러보면 사회의 어둡고 추운 곳에서 조용히 빛을 밝히고 있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넉넉치 않은 중에도 자신이 쓸 것을 아끼고 쪼개 타인과 나누는 이들의 삶을 돌아보며 세상에 휩쓸려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녹여보자./글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내 몸 불편해도 할머니들 돕는 게 좋아요"
지하철 5호선 끝자락에 위치한 송파구 마천동. 나지막한 건물 사이에 자리잡은 문재진(47)씨의 작은 집 앞에 특이한 자전거 한 대가 놓여 있다. 넘어지지 않도록 세발로 직접 개조한 자전거 뒤쪽에 양철로 만든 작은 수레가 눈에 띈다. 뇌성마비 2급이라 말하기도 자유롭지 않은 문씨가 힘겹게 입을 연다. "이 동네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들이 많이 계셔서 조금씩 도와드리고 있어요. 자전거로 반찬도 날라 드리고 명절 때는 선물도 전해드리고 조금 있으면 김장김치도…."
같은 동네에서만 37년째 살고 있는 문씨가 독거 노인을 돌보기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 20년 전 세상을 뜬 어머니 생각에 한분 두분 돕다 보니 어느새 동네 할머니들의 아들 노릇을 하게 됐다. 11명의 할머니들에게 한달에 4만원씩 생활비를 보태고 해마다 서너차례 홍천, 미사리, 파주 등으로 나들이를 기획하는 것도 문씨의 몫이다. 수시로 할머니들의 집을 돌며 건강은 어떤지, 반찬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담배가게를 하다가 어머니가 쓰러지는 바람에 그만두고 그 후로 리어카 과일장사부터 시작, 버스에서 껌과 신문도 팔고 시장 바닥을 기어야 하는 잡동사니 장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는 문씨. 살아온 나날이 너무 힘들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지금 결혼도 않은채 달력과 카드 영업 등을 하며 생활을 꾸려간다. 다행히 주변에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목사님과 친구들도 돕겠다고 나서 한결 마음이 가볍다.
"할머니들을 도우니깐 항상 제 마음이 여유롭고 즐거워요. 그 분들이 제 걱정을 많이 해주고 아들처럼 챙겨 주시니까 '몸이 불편해도 할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죠. 여유가 되면 시골에 땅을 사서 할머니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집을 짓고 싶어요."
'노인의 사랑방'에서 딸노릇 톡톡
올해 삼성 효행상 경로상 수상자로 선정된 박정자(58)씨도 편치 않은 몸으로 마산 상남동 일대의 노인들을 돌본다. 발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130㎝가 채 되지 않는 키에 10살이 될 때까지 걷지도 못했다는 박씨지만 7년 전부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먹이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사비를 털어 1주일에 두번씩 서른 명이 넘는 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아들마저 결혼하자 왠지 마음이 허전해 노인들을 모시기 시작했지요. 한여름에도 갈 곳이 없어 뜨거운 길거리에 앉아 계신 걸 보고 저희 집에 와서 노시라고 한 거죠. 식사 때 국수나 말아드리고 종일 편하게 계시다 가시라고 방을 내드렸더니 다음 번엔 친구분과 함께 오시고…. 그래서 찾아오시는 어르신의 수가 늘었고 지금은 아예 '노인의 사랑방'이라는 간판까지 걸게 됐어요."
사랑방 운영 비용은 박씨의 네 형제들이 5만원, 10만원씩 보내오는 것과 주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1만∼2만원씩 조금씩 보태주는 것으로 충당한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 언덕배기에 위치한 사랑방까지 걸어오기 힘들어 하는 노인들을 위해 직접 반찬을 만들어 배달하기도 하고 휠체어에 태워 목욕탕에 모시기도 하는 등 박씨의 '딸 노릇'은 끝이 없다.
"몸이 너무 아픈데도 홀로 살고 계신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지금은 다섯 분을 집에서 직접 모시고 있어요. 막노동을 하면서도 거지를 보면 단칸방으로 데려와 먹이고 재웠던 남편이 젊을 땐 참 미웠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에게 나의 것을 나눠주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점점 부유해 지거든요. 죽으면 가져갈 것도 아니고 어차피 밥 먹고 사는 건데 이왕이면 어려운 분들과 함께 나누며 살면 좋지요."
노인들을 모시고 사는 사랑방이 언제 재개발될지 모르는 무허가 건물인데다 재래식 화장실에 제대로 된 목욕탕이 없어 노인들에게 미안하다는 박씨. 그녀의 소원은 산 밑에 작은 집을 지어 어려운 어르신들을 모시고 같이 사는 것이다.
"환자를 찾아가는 보람이 얼마나 큰데요"
노원구 상계동 '빛사랑 안과' 이동호(39) 원장은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5년 전부터 무료진료를 해오고 있다. 한달에 6∼7회씩 지역 복지관을 돌며 한 번 나갈 때마다 100여명씩, 1년이면 1만명이 넘는 노인들의 눈을 돌본다. 정기적으로 찾는 곳만 복지관 8곳을 포함해 양로원, 시립요양원 등 20여곳에 이른다. 각종 약제와 수술 비용은 이 원장이 모두 부담한다.
중고등학생 시절 폐에 큰 병이 생겨 절제수술을 하는 등 병원에 드나들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이 원장. 발로 뛰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처음의 다짐을 잊지 않고 1998년 개원하자마자 보건소와 복지관에 의뢰해 환자를 직접 찾아 나섰다. 병원이 문을 열지 않는 휴일에만 봉사를 하는 것은 노인들을 배려하지 않는 처사라며 반드시 평일 병원 일을 제쳐두고 복지관을 찾는다.
"지금은 병원에서 함께 일하는 의사가 세 명으로 늘었지만 처음에는 병원 문을 닫고 무료진료를 나갔죠. 한두 번 나가다 보니깐 할머니 할아버지들 얼굴이 눈에 밟혀 안 갈 수가 없겠더라구요. 저는 제가 갖고 있는 기술로 그 분들을 치료하고 그 대가로 무한한 정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함께 사는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 원장은 무료 진료 외에도 어버이날 '꽃달아주기' 운동을 추진하고 명절 때마다 사비를 털어 복지관에서 잔치를 열며 노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지구는 더불어 사는 곳이죠"
UN산하 아동복지기구인 '플랜 코리아'를 통해 8명의 필리핀, 베트남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는 '한 아카데미' 최한 원장은 정성과 시간을 투자해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달에 3만원씩 이들을 후원하는 것과 함께 매달 한통씩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파일 여덟 개에 가득하다. 베트남과 필리핀 사무소에서 '한 초이'는 유명한 이름. 전 세계 플랜에 소속된 100만 명의 후원자 중에 매달 편지를 보내는 이는 최 원장 한명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다른 나라를 도와야 하는 명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도움 받지 않은 사람은 도울 수도 없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단지 이 지구는 함께 사는 곳이기에 3만원을 가장 값지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최 원장은 교육이 한 사람의 인생에 이어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믿기에 3년 전 플랜을 통해 결연을 맺기 시작했다. 2000년 5월에는 베트남, 2001년 4월에는 필리핀 아이와의 인연을 시작했는데 '최고의 학생상을 받았다' '성적표가 온통 A 뿐이다'라는 편지를 받을 때면 직원들에게 자랑하기에 바쁘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지라는 편지를 계속 보내다보니 변화되는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해외 아동 결연이 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단지 자동이체만 해놓지 마시고 사랑이 담긴 편지를 꾸준히 써주십시오. 쓰다 남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베풂이 아닙니다. 남을 도우려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잠자는 시간을 줄여야 해요."
"부임하는 학교마다 사랑의 교실 운영"
수원농생명과학고 이해숙 교사는 '남을 돕는 습관은 어릴 때 들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학생과 교사를 상대로 다양한 기부와 자원봉사 운동을 벌이는 '사랑 전도사'다. 그녀는 경기교육자원봉사단체 협의회 사무국장, 한국시민자원봉사회 경기지회장이라는 직함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1995년부터 학생들을 데리고 보육원과 양로원을 찾고 꽃동네, 한사랑마을 등의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이 교사가 전근 가는 학교는 남을 돕자는 움직임으로 들썩거린다.
이 교사가 현재 가장 힘쓰고 있는 일은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과 함께 하는 '한학급 한 생명 살리기 운동'이다. 월드비전을 통해 해외의 어려운 아동 1명을 후원하는 데 드는 비용은 한 달에 2만원. 한 반 아이들이 500원씩 모아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아이를 살리자는 취지로 시작된 이 운동에 벌써 경기도내 550여 학급이 참여하고 있다.
"문제가 있던 아이들이 봉사활동을 하고 기부 문화를 접하면서 올바르게 변해가는 것은 감동적입니다. 남을 어떻게 도울까 아이들 스스로 토론하고 상의하면서 학급이 똘똘 뭉치게 되니 자연스럽게 '왕따'도 사라지지요. 가장 즐거운 것은 남을 돕는 것을 통해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사는 곳임을 잊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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