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혜영이는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회 활동비라면 10원 한장까지 영수증을 첨부해 사용내역을 제출하는 꼼꼼함을 보여 학교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 어느덧 우리 가정의 생활신조가 된 셈이었다.혜영이가 나에게 상의했던 두 번째 기억은 대학을 졸업하고 민주화투쟁을 하다 정치에 입문하기 직전이었다. 한겨레민주당으로 부천에 나올 때였는데 "아버지,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는데 어떻겠습니까"라며 나의 의중을 물어왔다. 나는 두 가지 확답을 받고싶었다. 그래서 "돈에 유혹받지 않고 양심대로 정치할 자신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혜영이는 "지금까지 민주화투쟁으로 먼 길을 걸어온 것도 양심대로 살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또 돈이야 뭘 해서라도 벌 수 있는데 휘둘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걱정을 말라는 것이었다. 혜영이는 그러나 첫번 도전에서 떨어지고 민주당으로 출마한 두 번째 도전에서 당선됐다.
혜영이가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것을 보면서 막내딸인 혜경이도 대학시절부터 감옥에 들락거려 풀무원 농장은 한때 형사들의 집중감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생이면 이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때라고 믿었기 때문에 불의가 아닌 다음에는 이래라 저래라 관여를 하지 않았다.
여태껏 나는 7남매에게 가정교육을 시키겠다며 별도로 가르친 것은 없지만 항상 맘속으로 기도했다. 나를 따라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어려운 길을 가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7남매는 나의 기도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에 살고 있는 첫째 혜덕이나 풀무원관련 사업을 하고있는 둘째 혜진, 부천시장인 큰아들 혜영, 교사인 셋째딸 혜주, 나를 따라 농장을 하고 있는 넷째딸 혜덕 부부, 가정주부인 막내딸 혜경, 유학을 마치고 강사일을 하고 있는 막내아들 혜석 모두가 나에게는 자랑이며 행복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지켜주는 사람은 집사람이다. 사람 하나 믿고 보통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나를 따라 나선 지가 벌써 60년이 훌쩍 넘었다. 결혼 초기 중국으로 건너가 인쇄소를 함께 하면서 숱한 고생을 했고 전쟁 통에는 내가 제주도로 끌려가는 바람에 집안일을 혼자 떠맡던 중에 둘째 아이를 잃는 고통도 겪어야 했다. 부천에서부터 양주까지 이어진 40여년 동안은 그 많은 공동체 식구들 뒷치닥거리를 하다 보니 몸도 많이 상했다. 양주로 건너와서 함께 현미식을 하면서 나는 건강을 되찾았지만 집사람은 현미식의 효과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허리가 굽어 바깥 출입조차 어렵게 됐다. 집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럽기 그지없지만 내가 도와줄 방법이 따로 없는 게 더욱 안타깝다. 나는 집사람의 건강을 기도할 뿐이다.
눈을 돌려 최근 사회 현상을 보면 걱정부터 앞선다. 남편과 부인을 서로 바꿔 부부관계를 맺는 스와핑이 나타날 정도로 가족해체 현상이 진행됐고 미비한 교육제도로 학생들의 투신이 줄을 잇는가 하면 여전히 부유층은 부(富)를 부여잡고 놓지 않고있다. 국제적으로도 지구상의 최강대국이 된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며 약자를 굴복시키는 한편으로 수십억의 인구는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런 불평등과 사회갈등이 계속된다면 과연 인류에게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과연 방법이 없는 것일까. 내가 지금까지 공동체를 이끌면서 경험해 본 바로는 해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개인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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