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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9> 원조낙원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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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9> 원조낙원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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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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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나는 이맘 때쯤이면 농촌 아이들의 마음은 저절로 설레게 마련이었다. 시루떡을 앉히는 날이 다가오니까. 큼직한 시루가 가마솥 위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나면 아이들은 아예 집 밖으로 나갈줄 몰랐다. 연신 부엌을 들락거리며 떡이 언제 익을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시루를 들어내면서 시루와 솥 사이에 김이 새지 않도록 빙 둘러 쳐놓은 시룻번을 떼어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불과 한 세대 전 풍경이다. 먹거리가 흔치 않던 그 시절 시루떡은 으뜸가는 별미였다. 굳이 농촌이 아니라도 음력 시월 상달이면 도시에서도 웬만한 집은 길일을 택해 시루떡을 놓고 고사를 지냈다.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루떡의 김 속에는 이렇듯 유년의 향수가 서려 있다. 집집마다 여인네들이 한껏 솜씨를 부려 떡을 빚던 미풍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떡집의 맞춤떡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교동초등학교 인근의 원조낙원떡집은 전통의 맛, 그 중에서도 궁중의 비법을 살린 떡을 빚어왔다고 자부한다. 올해로 창업 80년,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이 집 식구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낙원떡집의 대표는 이광순(李光順·60)씨. 외할머니(고익보)와 친정어머니(김인동·80)를 거쳤으니 3대째 대물림이 이뤄진 셈이다. 동생 광희(光熙·48) 광자(光子·42), 사촌언니 순옥(順玉·66)씨도 일손을 돕는다.

쌀을 골라 물에 불리고 재료배합을 맞추는 일에서부터 쪄낸 떡을 모양을 살려 자르고 고명을 얹거나 가루를 묻히는 일까지 일일이 손을 거쳐야 한다. 방아를 찧고 쌀을 쪄 내는 작업만 기계의 힘을 빌린다. 몸으로 때우는 일이다 보니 남의 식구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사람의 입은 속일 수 없습니다. 맛이 변했으면 우리 집도 벌써 문을 닫았을 겁니다. 떡은 간을 맞추는 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너무 짜거나 싱거우면 안되지요."

정성, 재료, 손 맛이 떡의 품질을 결정짓는다. 광순씨의 절대적인 믿음이다. 그의 넉넉한 인심도 맛과 더불어 평생고객을 확보하는 비법이다.

떡 중의 떡은 단연 오색경단과 두텁떡이다. 경단의 고물에 물들이는 다섯 가지 색은 오행, 오덕, 오미와 마찬가지로 만물의 조화를 상징한다. 두텁떡은 대표적인 궁중음식이다. 절묘한 맛에 걸맞게 만드는 법도 아주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간다. 여염집에서 쉽게 손댈 수 있는 떡이 아니다. 이와 함께 시루떡 무지개떡 백설기 인절미 절편 송편 바람떡 마구설기 약식 영양떡 증편 홍찰편 꿀떡 쑥굴레 가래떡 등 이 집에서 내놓는 떡은 수십 가지나 된다.

이바지떡도 빼놓을 수 없다. 사돈끼리 주고 받는 선물인데 모듬떡과 한과 과일 갈비 생선 전 술 등 갖은 음식이 어울려 있다. 모든 정성을 담은 음식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모듬떡은 당연히 찰떡으로 빚는다. 신혼부부의 찰떡궁합을 바라는 의미에서다. 시어머니의 입이 찰떡처럼 달라붙어 부디 자기 딸로 하여금 매운 시집살이를 면하게 해달라는, 친정어머니의 간절한 소망도 깃들어 있다.

광순씨는 80년 10월1일 친정어머니에게 가게를 물려 받았다. 그래서 창업일을 이 날로 정했다. 낙원떡집의 상호를 내 건 집이 하도 많아 '원조'라는 두 글자를 보태 '원조낙원떡집'으로 상표등록을 했다. 외할머니가 떡집을 차린 해는 1920년께. 외할머니는 원서동에 살던 상궁과 나인들의 집을 드나들며 떡을 만드는 비법을 배웠다. 낙원동 일대는 '떡전골목'이라 불릴 만큼 80년대만해도 30여 개의 떡집이 영업을 했지만 지금은 두 손으로 셀 정도로 줄었다. 햄버거 피자 등 패스트 푸드에 길들여진 신세대의 입맛에 떡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떡은 촌스럽다'는 웃지 못할 풍조도 한몫 했다.

지난 세월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 거리를 낙원떡집은 간직하고 있다. 배달에 얽힌 실수가 가장 많다. 지금이야 그 일을 떠올리며 요절복통하지만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70년대 태릉 국가대표선수촌 개촌식 때였습니다. 트럭 한 대분의 떡을 준비했는데 그릇이 마땅치 않아 송판을 대패로 얇게 밀어 도시락으로 만들어 떡을 담았습니다. 막상 떡을 먹으려고 하니 송진냄새가 난다고 해서 난리가 났습니다. 모두 회수해서 사회복지시설에 보낸 뒤 한강에 나가 하루 종일 울었지요." 반세기 넘게 떡을 주무르며 살아온 광순씨는 그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칠순잔치떡에 '축 돌'의 글자를 써 보낸 것은 차라리 애교였다. 그 노인은 오히려 "돌떡을 받았으니 100세도 더 살게 될 거야"라며 폭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언젠가 환자 분의 가족이 떡을 사러 왔습니다. 죽기 전에 낙원떡집 떡을 먹고 싶다고 해서 사러 왔다고 사연을 들려주더군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는 마당에 우리 집 떡을 드시고 싶다고 하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 백일떡의 주인공이 커서 혼인떡을 맞추러 오는 경우는 흔하다.

광순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떡은 영양학적으로도 만점에 가깝다. 가장 보편적인 무시루떡을 보자. 주재료인 맵쌀에 부족한 비타민 B1과 단백질은 팥고물, 비타민 C는 부재료인 무가 보충해준다. 첫 맛은 무미에 가깝지만 씹을 수록 담백하고 오묘한 맛이 잔잔하게 입안을 채우는 먹거리가 떡이다. "떡은 천 가지 맛을 지닌 음식이다." 요리전문가들의 감탄이 결코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한국인 삶 마디마다 떡 등장

'이치저치 시루떡/ 늘어졌다 가래떡/ 오색가지 기자떡/ 쿵쿵쳤다 인절미/ 수절과부 정절편/ 올기쫄기 송기떡/ 도리납짝 송편떡/….'

떡을 빚는 흥겨운 모습과 떡의 생김새를 노래한 달성지방의 민요다. 한국인은 삶의 마디마다 떡을 달고 살아왔다. 생일 혼인 환갑은 물론 죽어서도 제사상의 진설품으로 떡은 상에 오른다. 떡은 이처럼 통과의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태어난 지 삼칠(21)일이 되면 삼칠일떡을 한다. 순백색의 백설기를 찌는데 아이와 산모를 속세와 섞지 않고 산신(産神)의 보호 아래 둔다는 뜻에서다. 그래서 삼칠일 떡만큼은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가족끼리 나눠 먹는다. 백일상의 떡으로는 백설기 팥고물찰수수경단 오색송편을 준비한다. 찰수수경단에 묻히는 붉은 팥고물은 귀신을 쫓는 벽사의 의미를 갖는다. 백일떡은 100집에 나눠줘야 아이가 장수하고 큰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떡을 받은 집에서는 반드시 흰 무명실이나 흰 쌀을 담아 그릇을 돌려보내는 풍습이 있다.

돌에는 백설기 팥고물찰수수경단 오색송편 무지개떡 인절미 개피떡이 차려진다. 결혼식을 앞두고 신랑집은 신부집에 함과 함께 봉채떡을 보낸다. 회갑연에는 갖은편이라 해서 백편 꿀편 승검초편을 만들어 높이 괸다. 예전에는 갖가지 색떡을 빚어 나무에 꽃이 핀 모양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제사상의 떡은 녹두고물편 꿀편 흑임자고물편 등 편류로 준비한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떡을 가장 정결한 음식으로 여겼다. 떡에 해당하는 서양의 케이크 역시 명절이나 잔치에 내놓는 의례음식에서 출발했다. 떡은 별식이다. '밥 위에 떡'이란 속담도 그래서 생겨 난 것이다. 떡은 종류만해도 200가지가 훨씬 넘는다.

'병(餠)을 물어 잇자국을 시험한 즉 유리의 잇금이 많은 지라 조신들이 유리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떡에 관한 내용이다.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만드는데 쓰는 갈돌이 신석기시대 유적지인 황해도 봉산 지탑리에서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인 함북 나진의 초도 조개더미에서는 시루가 발견되기도 했다. 황해도 안악의 고구려시대 고분 동수무덤 벽화에는 시루에 무엇인가 찌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떡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음식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먹거리로 자리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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