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가 전례 없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제한상영관이 없는데도 '제한상영가' 등급 분류가 존재하는 등 '검열'의 잔재가 여전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등급 분류가 전에 비해 느슨해졌고, 관객들의 태도도 한결 너그러워졌다. 잔혹한 장면이 문제가 돼 '제한상영가' 등급으로 분류됐다가 12초 정도의 분량을 자르고 '18세 이상 관람가'로 등급이 조정돼 개봉되는 '킬빌'의 예에 비추어 한국 영화의 표현의 자유는 오히려 외국 영화보다도 더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더욱이 오랫동안 다수 구성원의 묵시적 동의 아래 사회적 금기(禁忌)로 여겨져 온 소재나 주제에까지 손을 뻗치는 최근의 상황은 한국 영화가 누리고 있는 표현의 자유의 한계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보수적 한국 사회에서 유독 영화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인가, 그만큼 사회 전체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확대된 것인가.#터부 1
영화 '301·302'에서 황신혜의 거식증은 양아버지의 강간이라는 트라우마에 의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친 아버지가 아닌 양아버지라는 설정으로 근친상간의 금기를 피해갔다.
영화 '와니와 준하'에서 동생 조승우와 누나 김희선 사이에는 야릇한 감정이 흐르지만 두 사람은 친남매가 아닌 이복 남매로 설정됐다. '중독'은 형수 이미연과 시동생 이병헌의 섹스 장면으로 관객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두 사람은 피붙이가 아니었다.
이 영화들이 그 너머로 눈길을 두면서도 끝내 넘지 않았던 최후의 담장이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올드보이'는 이 담을 넘은 최초의 한국 영화로 기록될 듯하다. 경계선 넘기는 영화 속 두 인물의 대립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으로서 무리하게 삽입됐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적지않은 사회적 파문과 논란이 예상된다.
영상물등급분류위원회 등급분류 소위원회의 한 위원은 " '킬빌'의 경우 팔 다리가 잘리는, 구체적으로 잔혹한 장면이 문제가 돼 '제한상영가' 등급 분류가 불가피했으나, '올드보이'는 심의과정에서 약간의 논란은 있었으나 특정 소재나 표현에 의도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본격적 논쟁이 빚어지진 않았다"고 전했다.
이 영화는 물론 경계선 넘기를 드러내 놓고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은 데다 이 부분을 손질할 경우 영화 전체의 틀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부분 삭제는 영화 상영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의 완성도가 높다는 점에서 터부를 깬 충격이 심각하게 인식되진 않더라도 영화가 개봉되면 시민단체의 반발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어쨌든 한국 영화는 이 영화로써 루비콘 강을 건넜다.
#터부 2
미국 주류 영화에서 영·유아 살해는 흥행과 맞바꿀 만큼 강력한 터부로 존재해 왔다. '디 아더스'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니컬 키드먼 가족이 죽은 사람들이었다는 기발한 설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아이 둘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 한국 영화는 영·유아 살해를 스스럼없이 다루었다. '사인용 식탁'에서는 10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죽어가고, '바람난 가족'은 유괴된 아이가 건물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그대로 나온다. 두 영화 모두 이러한 잔혹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은 탓에 정면 비판을 받진 않았고, 관객들도 이런 장면 자체를 논쟁 거리로 삼지는 않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지적도 적잖았다.
#터부 3
영화 '해피 엔딩'의 결말은 결코 '해피'하지 않았다. 아이 분유에 수면제를 타서 먹이고 정부를 만나러 간 여자 전도연은 남편 손에 살해됐다. 한국 영화에서 바람 난 여자의 운명은 이처럼 늘 비참했다. 그러나 '바람난 가족'에서 응징을 당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남편의 무덤에 풀이 마르기 전에 '바람' 난 남자와 이민을 가는 시어머니, 옆 집 고등학생의 아이를 가진 아내가 남편을 '아웃' 시키는 설정으로 '여성 승, 남성 패'라는 결론을 이끈다. 한국적 금기를 깬 이런 파격적 결말은 베니스 영화제 진출은 물론 인터넷 펀드를 통한 자금 공모에서 펀드 공모자들에게 79.4%의 수익을 배당하는 상업적 성공까지 가져왔다. 드라마 '앞집 여자' 가 결국 '그래도 가정이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던질 수밖에 없는 한국적 상황을 영화만큼은 거부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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