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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57>李興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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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57>李興烈

입력
2003.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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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17일 작곡가 이흥렬이 71세로 작고했다. 이흥렬은 함남 원산 출신이다. 지금의 도쿄(東京) 음악대학 전신인 도요(東洋) 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귀국해 교직에 종사하면서 작곡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작품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가곡 '바위고개'(1934)일 것이다. 작곡자가 직접 쓴 가사의 1절은 이렇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가사도 가락도 애처로운 이 노래는 흔히 일제 강점기 조선 민족의 비운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생전의 이흥렬도 가사 속의 '님'이 조국을 뜻한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말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 청년 이흥렬이 느꼈을 비애가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포개지며 이 애잔한 노래로 응결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이흥렬은 그 뒤의 노골적인 친일 행적으로 젊은 날의 이 순수를 값없게 만들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터진 뒤 이른바 국민개창운동을 통해 군국 가요 보급에 매진하며 일제 침략 전쟁의 나팔수가 되었다. 그의 노래는 어느 새 증오의 노래가 되어 있었다.

이흥렬은 일제 말기의 국민개창운동을 해방 이후에도 이어나갔다. 일제 말기에는 증오의 표적이 귀축영미(鬼畜英美)였지만, 이번에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는 오선지에 반공을 새기며 남한 사회의 주류에 안착했다. 이흥렬은 1957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예술원 회원으로 있으면서 고려대·숙명여대에서 가르쳤고, 한국작곡가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1960년대에 방송가요심의위원으로서 이른바 왜색 가요를 솎아내는 일을 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보다 20년 전 그는 조선천지를 왜색 가요로 물들이느라 온 힘을 쏟고 있었으니 말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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