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설립 후 거창고의 시련은 끝이 없었다. 대부분의 시련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바른 교육을 시키겠다는 전영창 교장과 우리 이사진의 의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온 시련은 거창고를 더욱 굳건하게 단련시켰다.학교를 설립한 지 약 10년이 흐른 1969년에 3선개헌파동이 있었는데 거창고 학생들도 시대적 흐름을 좇아 반대데모 행렬에 참여하게 됐다. 이를 두고 교육위원회나 각 기관에서 주모자를 처벌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 교장은 학생들이 틀린 주장을 한 게 아니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화당의 지역구 의원까지 가세해 학교를 압박해 들어왔다. 그 의원은 거창까지 내려와 전 교장을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학교 문 닫을 줄 알아"라며 큰 소리 쳤지만 전 교장은 도리어 "거창고 문닫기 전에 공화당이 먼저 문닫을 줄 아시오"라고 맞받아치고 나왔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뒤에 곳곳에서 트집을 잡아오는 바람에 거창고는 더욱 궁지에 빠지게 됐다.
특히 교육위원회와 교육청은 집요하게 거창고를 공격해 왔다. 한번은 감사를 내려와 한나절이면 끝날 일을 4일 동안 샅샅이 뒤지더니 3가지를 위반사항이라고 지적하고 나왔다. 학급당 정원을 초과했고 무자격 교사를 채용했으며 이사장 승인 없이 교장이 200만원을 기채(起債)했다는 것인데 이를 빌미로 교장임명을 취소해 버렸다. 나는 학교재단 이사인 장기려 박사와 함께 부산에 있던 교육청으로 찾아갔지만 교육감도 어쩔 수 없다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소송을 하기로 했다.
소송은 너무나 싱겁게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쟁송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이다. 교육청은 대법원에 상소까지 했지만 최종적으로 기각되는 바람에 우리는 거창고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었다.
전 교장의 뒤를 이어 교장이 된 전성은 선생 시절에도 학교는 여러 차례 문닫을 위기에 처해야 했다. 이 말은 설립자가 운명을 달리한 뒤에도 바른 교육의 이념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 계속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성은 선생이 교장을 맡은 지 얼마되지 않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그런데 군사정권은 사회정화를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무자비하게 인권을 유린했는데 탄압의 손길은 일반 고등학교에까지 미쳤다. 재교육시킬 문제학생을 군 당국에 넘기라는 지시가 각 학교에 내려온 것이다. 학교에서 군 당국에 문제학생을 찍어서 보고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학생을 끌고 가서 초죽음을 만들어 내보내는 비교육적인 행태가 곳곳에서 빚어졌다.
거창고에도 이런 지시가 내려왔지만 교장은 들은 체도 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교감에게도 같은 압력이 내려왔다. 당시 교감이 지금 거창고의 교장인 도재원 선생인데 그 역시 만만찮은 사람이었다. 도 교감은 그 지시를 받고는 교육청으로 찾아가 "우리는 절대 이런 비교육적인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라고 담당국장을 몰아부쳤다고 한다. "국장님도 교육학을 전공한 것으로 아는데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지 못할 경우에 군대로 보낼 수 있다는 구절이 교육학 어디에 나옵니까. 또 학생을 교육시키지 못하는 학교라면 교사들이 학교를 그만두든가 학교가 문을 닫아야지 군대로 학생을 보내 재교육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고 퍼붓자 국장도 그제서야 "도 교감, 내가 하고싶어 하겠어, 위에서 시키니 하는 수 없이 하는 일이지"라며 꼬리를 내리더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은 뒤로 학교에는 부당한 요구가 없었고 거창고에서는 한명의 학생도 군대에 넘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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