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헌석(47·사진)씨는 1990년 두 번째 소설집을 낸 뒤 "나의 얘기를 쓰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고 했다. 암울했던 80년대의 사회 현실을 르포 형식으로 풀어낸 소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로 주목된 그이다. '태양은…'의 주인공처럼 신문기자로 살아오면서 "알몸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가 쉽지 않고, 삶 자체도 뒤죽박죽이어서" 오래 침묵했다.양씨는 13년 만에 펴낸 자전적 장편소설 '오랑캐꽃'(실천문학 발행)에서 두 매듭을 함께 풀었다. 이데올로기의 덫으로 엉켰던 삶의 내용에다 90년대 이후 불어 닥친 IMF 경제위기로 엉킨 일들을 합쳐 긴 이야기를 썼다. 그 이야기에 입힌 소설의 옷이 도드라진 짜임새를 갖췄다. 두 남매의 시점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1장과 3장을 꾸몄으며, 2장은 객관적 3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했다. 어떤 종류의 얘기이건 예술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아버지는 평등한 사회주의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이었다. 유신정권 아래서 사회주의자 가족들은 가혹한 연좌제로 고통받아야 했다. 윤기립과 윤지원 두 남매도 마찬가지였다. 여동생 지원은 독한 의지로 연좌제의 덫을 빠져 나와 세상에 맞섰지만, 나약한 오빠 기립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기만 했다.
지원은 신문기자로 청량리 588의 구조적 비리를 헤집고 북한 예술가를 인터뷰하는 등 억척스럽게 활약했지만 관례와 검열이라는 사회의 덫을 넘지 못했다. 지원의 삶은 숨차게 질주해온 작가 자신의 '알몸 이야기'에 바탕한 고민이기도 하다. 여기에 겹쳐지는 오빠 기립의 병약한 인생은, 작가의 말처럼 "어려움이 보다 보편적으로 바뀐 사회에서 '경제 연좌제'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없이 도망치기만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도박처럼 벌인 주식 노름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렇게 얻은 부(富)가 오히려 가족을 산산이 흩뜨려 놓았다. 중년이 된 작가가 체험한 또 다른 엄혹한 현실이다. 양씨가 돌아보기에 이념과 경제의 연좌제를 겪었던 자신의 인생은, 덫 같은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는 의식으로 달려왔던 길이었다.
"연약한 듯 보이지만 질긴 생명력을 가진 오랑캐꽃이 험난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닮았다"는 생각에 붙인 제목의 소설 '오랑캐꽃'에 정직한 인생을 담았다.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여태껏 살아왔다. 이제 더 이상 고백은 하지 않을 것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