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뜨겁고 환한 불꽃과 차갑고 싸늘한 얼음이 함께 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연극 배우다.' 원로 연극 평론가 구희서씨는 박지일(43)을 그렇게 평했다.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광기를 숨긴 채 세상을 향해 열려있던 창을 닫고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는 인간 군상들을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소화해온 그에게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대학로에서 박지일은 스타다. 한국 연극계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연극 배우라는 평가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올 한해만 해도 '보이첵', '바다와 양산', '서안화차' 등 연극 세 편에 잇따라 출연, 강렬하고 폭발적인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보이첵'에서는 자신을 배신한 아내를 살해하는 육군 병사, '바다와 양산'에서는 소시민 타케후미, '서안화차'에서는 남자로서 남자를 사랑하다가 처절한 파멸을 맡는 인물 '상곤' 역을 각각 맡았다.그런 박지일이 연극 '추적'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14일부터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추적'은 '죽음과 소녀'로 우리에게 알려진 아르헨티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독자(Reader)'를 한국 현실에 맞게 각색한 작품. 검열이 자행되는 군부 독재 체제하의 현실과, 훨씬 정교한 형태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촘촘한 구조 속에 녹였다. 80년대 군부 정권 아래서 보안사 검열관으로 활동한 '문민호'와 2027년 지구를 통제하는 조직인 세계경영지원센터 한국 지부의 출판문화지원 실장 '사로'가 각기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소설과 영화 대본을 검열하게 되면서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박지일은 '문민호'와 '사로' 역을 번갈아가며 연기한다.
"정치 권력 통제는 사라졌지만 훨씬 교묘한 억압의 장치들은 여전히 삶의 도처에 숨어 있죠. 자유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덕목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연출을 맡은 박상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부터 1년 전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다는 박지일의 작품 분석은 꼼꼼했다. "문민호와 사로는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과 체제에 철저하게 침묵하고 타협하는 인물들이죠. 이들을 통해서 자유는 침묵에 저항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 만이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박지일은 "문민호와 사로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점에서 같지만 성격 면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며 "문민호는 권력의 폭력성을 거칠게 드러내듯 그대로 보여주면 되지만 사로는 보다 세밀한 내면 세계를 보여줘야 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한 작품에서 두 인물을 표현해 내기 위한 그의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문민호가 쓰는 짙은 경상도 사투리와 사로의 서울말은 둘의 성격을 구분 짓는 수단이다.
"서울에 와서 외국어 공부하듯 서울말을 배웠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몸에 밴 경상도 사투리로 연기를 하게 돼 묘한 향수 같은 게 들더군요." 그는 "85년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이윤택씨가 연출한 '죽음의 푸가'로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경상도 사투리로 연극 공연을 하는 것은 국내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새로운 모습과 숨어 있던 배우로서의 자질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축복으로 여긴다"는 말을 덧붙였다. 공연은 12월7일까지 계속된다. 문의 (02) 762―0810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