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Weekzine Free/ 司試 1,000명 시대-어느 연수원생의 고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Weekzine Free/ 司試 1,000명 시대-어느 연수원생의 고민

입력
2003.11.14 00:00
0 0

내년 초 수료하는 사법연수원 33기, 올해 들어간 34기는 사시 1,000명 시대의 수혜자이자 피해자다. 한층 치열해진 경쟁 속에서 이들은 끝이 아니라 또다른 출발선상에서 긴장된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2002년 서울 서초동에서 일산 장항동으로 이전해온 사법연수원. 이곳에서 더 힘든 관문을 향해 밤을 밝히는 이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이들 토대로 가상의 A(30세)씨를 만들었다. 그를 통해 연수원생의 삶과 고민을 뒤쫓아 보았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냉소와 기대, 엇갈리는 영상

눈을 뜨면 7평 남짓한 기숙사 방. 어김없이 오늘도 경쟁의 수레바퀴는 돌아간다. 룸메이트는 도서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일찌감치 자리를 뜨고 없다. A씨는 어제 조모임 동기들과 먹은 폭탄주 때문에 속이 쓰려왔다. 거울을 보며 얼굴을 씻자 "겨우 대리급 월급 받으려고, 그 고생을 하며 연수원에 들어왔나"는 동기의 주정이 귓가에 울렸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가 건넨 말이 오버랩 됐다. 연수원생인걸 알자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며 "나한테 진 빚을 훌륭한 법조인이 돼 꼭 사회에 돌려달라"며 미소를 띠던 50대의 아저씨.

A씨는 주섬주섬 연수원 교복인 '양복'을 챙겨 입었다. 그래, 슬리퍼에 추리닝복의 고시생에서 이젠 양복 차림의 연수원생이다. 월 6만원인 기숙사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 연수원생 2,000명에 기숙사 인원은 400명. 추첨에서 떨어진 친구들은 연수원 근처에 방을 구했다. 월급으로 100만 정도 받는데 월세만도 만만치 않다.

1∼2점이 가르는 운명

오전 10시 첫 수업은 2시간짜리 '민사재판실무'. 대형 강의실에서 이뤄지는 수업이 각 반으로 화상으로 전달돼 진행된다. 카메라가 자동으로 교수를 따라가며 잡아준다. 대학교에선 보지 못했던 첨단 시설이다.

옆 자리 동기가 최근 치른 검찰실무 쪽지시험 결과를 들었냐고 물었다. "두개 틀리면 꼴찌라던데, 그런 얘기가 있어." 실수로 두개 틀렸는데 그럼 내가 꼴지? 쪽지시험이야 성적에 크게 반영되진 않지만, A씨는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점수 차가 얼마 나지 않지만 시험은 언제나 상대평가다. 미세한 차이가 운명을 가른다.

치열한 경쟁, 성적만이 살 길이다.

34기인 A씨는 졸업을 앞둔 33기 동문 선배와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변호사 개업을 준비중인 선배는 "취직하려면 세가지 조건이 있다더라. 서울대고, 남자고, 나이가 어리고….."라며 농담처럼 던졌다. 직장생활을 하다 늦깎이로 고시에 합격한 선배는 그래도 사회경험이 많고 인맥도 넓다. 개업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선배의 자신감이 A씨에겐 부러워 보였다.

연수원생들이 선호하는 취직 순위를 꼽는다면, 판검사 임용과 대형 로펌 취직이 일순위. 그 다음이 금감원, 국정원 등 국·공립기관이나 중소 로펌으로 가는 것이고, 안되면 삼성이나 LG 등 대기업 법무팀 취직을 선호한다. 과거 대기업에 가면 처음부터 상무급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값이 크게 떨어져 연봉 3,000만∼4,000만원 정도의 대리 혹은 과장급으로 시작한다.

검찰 시보로 일하던 한 연수원생이 경찰서장을 무릎 꿇게 했다는 이야기도 이젠 전설적 얘기다. 최근 경찰청이 사시출신 경정 특별채용 공고를 내자 8명 모집에 80여명이나 지원했다지 않은가.

늘어난 변호사 수에 비해 아직 변호사의 직무 영역은 넓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 취직에 고전하고 있는 상당수 사람들은 합동법률사무소의 '새끼변호사'로 가거나 직접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는 '개척자'의 길을 가야 한다.

하지만 사회 초년병인 A씨는 '서초동 법률시장에도 찬바람이 분다'는 기사라도 보면 '변호사 자격증 달랑 하나 들고 황야로 나서는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착잡해진다. 변호사 시장도 점차 전문화하고 있는데 어설픈 '막변'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성적의 분수령이 될 2학기 기말시험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무조건 성적은 잘 따야한다고 마음을 다졌다. 최근 신림동 고시촌의 독서실이 연수원 앞에 등장했다. A씨는 마치 신림동 고시 시절을 다시 겪고 있다는 착각이 스쳐지났다.

상당수는 결국 변호사로 갈텐데..

이날 오후는 수업은 따로 없고 기록지를 작성하는 과제 시간. 사건 기록을 보고 직접 재판 판결문을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옆자리의 동기가 "언제까지 재판 판결문만 베끼는 수업을 할건지…"라며 투덜거렸다. 연수원 시설이 첨단일지 모르지만 수업 내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연수생 1,000명 중 판검사로 임용되는 수는 350명선이지만 강의나 과제는 판검사 실무 교육으로만 채워져 있다. 때문에 올 7월 연수생 설문조사에서 77.7%가 "변호사 업무수행에 필요한 상담기술, 협상기술, 법률자문 등 실제 필요한 내용으로 교육을 다양화해야 한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기존 판례를 벗어난 창의적 시각의 판결문을 쓸 수 없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그래도 어차피 배워야 하는 법률용어를 숙련하는 시간. 기말시험 성적도 결국 판결문 작성에서 갈릴 것이다. A씨는 죽어라 판결문을 베껴 쓰는 연습을 했다.

연기되는 꿈

오후 5시. 연수원 자치회에서 마련한 이라크 파병 공청회가 소강당에서 열렸다. 이번 공청회를 주도적으로 마련한 자치회 인권법학회 회장은 운동권 학생회장 출신. 연수원 졸업후에도 공익소송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A씨도 자신의 꿈을 생각해보았다. 어릴 때 법정영화를 보면서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추억. 하지만 막연했던 환상은 깨졌다. 변호사는 영화와 달리 '말'이 아니라 서류로 해결하는 직업이었다.

우선은 판검사 임용을 목표로 달릴 수 밖에 없다. 어떤 일을 할지는 나중에 고민하자. 공청회 도중에 빠져나온 A씨는 동문회 모임 장소로 총총 걸음을 놓았다. 어제 먹은 술로 아직도 배가 쓰리긴 하지만, A씨로서는 빠질 수 없는 자리다. 가장 확실한 네트워크는 역시 동문회다. 밀어주고 끌어줄 동문 선배들에게서 확실한 눈도장을 받아야 한다.

또 다른 도전

밤 11시 동문회에서 돌아오는 시간. 선배들은 "연수원의 낭만은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A씨에게 그리워해야할 옛날은 없다. 고시생이라는 명찰이 아쉬울 것도 없다. 그 때에 비한다면야 지금은 용된 것지…. 목표는 뚜렷하다. 새로운 도전의 무대, 다시 땀을 쏟아야 한다. 12월 기말시험이 바짝 다가온 걸 생각하자 A씨는 한시간이라도 더 공부하기위해 민사재판 판례집의 책장을 열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