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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45> 개교 직후 폐교위기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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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45> 개교 직후 폐교위기를 맞다

입력
2003.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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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창 교장이 학교를 인수해 5년인가 지난 때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어수선한 정국에서는 시골학교까지 행정력이 미치지 않다가 3공화국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혀가자 갖가지 행정적 압박이 가해져 왔다. 거창고는 교장의 자격이 문제가 됐다. 전 교장이 급하게 학교를 인수하다 보니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다. 대학졸업장이 없는 전 교장의 경우 사립학교 교장 자격증을 얻으려면 10년 동안 교직에 몸담은 경력이 있어야 했는데 그는 그것도 5년밖에 안됐다. 그런데 목회활동도 교직경력으로 인정해 준다는 단서조항을 발견하고 서류를 꾸며 문교부(현 교육부)에 교장자격 심사를 요청했다.이사장인 나는 일이 잘못될까 싶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문교부의 국제교육과 직원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교장자격 심사는 교직과 소관이었지만 중간에서 힘을 좀 써달라는 부탁을 건넨 것이다. 그리곤 업무차 일본 출장길에 올랐다. 귀국길에 들른 학교에서는 그러나 불길한 소식이 들렸다. 교감은 밑도 끝도 없이 "잘 안되겠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문교부 국제교육과 직원의 호출로 올라갔더니 '교직과 담당 직원이 모두 세 명인데 양복이나 한 벌씩 해 주자'고 제안하더라는 것이다. 그 당시만해도 도시에서 교장자격증을 하나 따려면 100만원, 시골도 60만원 정도가 공식가격인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양복 한 벌은 1만5,000원 정도에 불과했지만 교감은 그 자리에서 "어떻게 교육부에서 뇌물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라며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관청에 뇌물을 바쳐가면서까지 교장자격증을 구할 이유가 없다는 데 우리는 뜻을 같이하고 나는 서울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교장자격증을 받지 못하면 이사장이 출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문교부로 들어가 국제교육과 그 직원을 만났다. 직원은 나를 보자마자 "이사장님은 그런 교감이랑 어떻게 학교 일을 하십니까"라며 안타까워했다. 교장자격증 하나 부탁하면서 4만5천원짜리 양복이 뭐가 아깝냐는 투였다. 나는 그 직원에게 "그렇게 청렴하고 강직한 학교가 문교부 아래 있다는 건 도리어 영광이 아닌가"라고 농담을 던진 뒤 직원을 앞세워 교직과로 향했다. 그런데 교직과에서는 "우리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나머지는 장관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며 볼일 없다는 투의 박대가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인사만 하고 발길을 돌렸다.

나는 숙고 끝에 전 교장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학교 문을 닫읍시다. 뇌물을 주고 교장자격증을 산다면 학교는 계속 운영할 수 있겠지만 학교를 시작한 우리의 각오는 허물어지고 맙니다. 더구나 다급하면 돈 주고 타협할 수도 있다는 악습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문을 닫게 되면 도리어 학생들에게 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교육의 효과도 있을 겁니다"는 내용쯤으로 생각된다. 나야 이사장으로 사실 한발 물러서 있는 상태였지만 전 교장으로서는 사실 받아들이기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시작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답장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연말 직전에 희소식이 날아왔다. 중간에서 연락하던 국제교육과 직원이 '교육부 차관의 결재가 났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터라 기쁨은 더 컸다. 바른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의지가 이심전심으로 윗선까지 전달됐던 모양이다.

감사의 뜻으로 나는 희소식을 전해준 국제교육과 직원과 교직과 직원 세 명을 함께 불러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문교부 직원들은 다소 의아해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돈이 아까워서 제의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교육적 소신 때문'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학교를 설립한 직후에 폐교를 당할뻔한 일은 이렇게 수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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