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썩했던 탈주범 신창원 사건 때였다. 수사본부 사무실 철제 의자에 그가 앉아 있었다. 그의 뒤와 옆으로 칸막이가 있었고 그 사이에 틈새가 있었다. 변호사로서 나는 조사에 입회하기 위해 구석에 앉아 있었다. 허락되지 않은 것을 억지를 부려 있게 된 것이다. 이윽고 한 여자가 그 곳으로 들어왔다. 수사관은 그 여자에게 칸막이 틈 사이로 신창원을 보라고 했다. 강간을 당했다는 그 여자는 최초 파출소에 신고할 때 자신의 집에 침입한 강도의 인상이 수배자 벽보에서 본 신창원과 비슷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벌써 언론은 신창원의 강도 강간을 기정사실화해서 대서특필했다. 그 여자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칸막이 틈을 통해 신창원을 찬찬히 살폈다.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여자의 뒤에 바짝 따라 붙었다. 그 여자의 눈빛, 표정, 순간적인 태도와 엉겁결에 내뱉는 말을 포착하기 위해서 였다. 이윽고 그 여자는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신창원이 범인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신창원 역시 내게 자신은 절대 강간만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곧 대질신문이 있었다."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여자가 엉거주춤 대답을 했다. 아니라는 뜻의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범인이면 범인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비슷한 게 뭡니까. 확실히 해요." 수사관이 위압적인 어조로 다그쳤다. 여자는 금방 기가 죽었다. "맞아요. 확실해요." 부정이 긍정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진술조서에는 내가 순간 포착을 했던 그 여자의 표정이나 태도, 그리고 느낀 진실이 실종됐다. 피해자의 강력하고 명확한 진술만이 남았다. 그걸 보고 확신한 검사는 강간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한번 길을 잘못 들어선 그 여자는 법정에서도 궤도 수정을 하지 못했다. 난 변호사이면서 동시에 내가 포착했던 그녀의 표정이나 태도에 대한 증인이 되었다. 재판에서 피해자 진술의 진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허점을 파고든 변호인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변호사가 조사에 입회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판결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변호사의 현장 참여는 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송두율씨 사건을 계기로 변호인 입회권이 논란이 되고 있다. 나는 수사기관의 조사과정에 여러 번 입회했다. 힘들 때가 많았다. 젊은 형사에게 모욕을 당한 적도 있다. 새벽까지 벌을 서듯 한 적도 있다. 내쫓기기도 하고 은근히 쏟아지는 수모도 참아야 했다. 친하게 된 베테랑 형사반장은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마음만 먹으면 못 만들 증거도 없다고 털어놓았다. 또 조작하지 못할 진술도 없다고 털어놓았다.
이제 변호사는 감시자로서 밀착방어를 해야 한다. 수사기록만 보고 판단만 하려는 또 하나의 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사서류는 형사의 시각에서 본 기록들이다. 반대 관점에서 변호사가 직접 보면서 대칭이 되는 기록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대법원이 수사과정에서 변호인 입회권을 허용하라는 판결을 한 것은 당연하다. 변호사 입회권은 민주주의에는 절대적 기초이다. 독버섯 같은 마피아 집사 변호사만 조심한다면….
엄 상 익 변호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