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J씨(33·연수원 34기). 비법대 출신으로 4년을 신림동 고시촌에서 수행한 끝에 사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축제는 단 하룻밤 뿐이었다. 함께 고생한 고시생들과 어울려 축하와 격려의 밤을 보낸 다음날 곧장 한 고시학원에서 운영하는 연수원대비반에 등록했다. 연수원 대비반은 지난해부터 생긴 고시촌의 새 풍물. 사시합격생들을 대상으로 사법연수원에서 수강할 과목을 '예습'시켜주는 강좌다. 사시 2차 합격자가 발표되는 12월초부터 연수원 입소식 직전까지 한시적으로 진행되는데 강의실이 터져나갈 정도로 인기다."연수원생중 한 30% 정도는 이 대비반을 거쳐서 온다고 봐요. 벌써 수업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거든요.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반증이지요."
사법연수원생들은 연수원에서의 임용경쟁이 '피를 말릴 정도로' 살벌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해 이때쯤 한 여성 연수원생은 마지막 기말시험 도중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숨졌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배경에는 한 기당 1,000명에 달하는 '연수생 과잉시대'의 고민이 그대로 녹아있다. 1,000명중 실제 판검사로 임용되는 숫자는 성적순으로 상위 30%인 350명선. 나머지는 보장된 미래가 아닌, 스스로 개척하는 미래를 살아야 한다. 예전엔 사법연수생이라면 '뚜쟁이'들이 줄을 섰지만 요즘은 '판검사 임용' 꼬리표가 붙어야 좋은 혼처가 나서는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연수생들의 풍속도도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공부에 매달리는 '책상물림파'와 인간관계 형성에 주력하는 '네트워크파'. 유명 법대출신에 나이가 젊을수록 상위 30%에 속해 임용을 받겠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책상물림이 많다.
반면 법대출신이 아니거나 사회생활을 하다 나이들어 사시에 합격한 사람일수록 변호사 개업을 염두에 두고 인맥 형성에 더 신경을 쏟는다. 판사 임용은 나이제한을 거의 받지않지만 검사 임용의 경우 조직특성상 35세 이하를 선호하기 때문에 나이가 걸리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변호사 개업쪽으로 방향을 튼다. 자연히 연수원 시절 동안 각종 인맥과 학맥을 총동원한 네트워크를 쌓는 것에 주력하게 된다.
기수별로도 연수원생활의 태도차이가 두드러진다. 내년 초 연수원 졸업과 함께 개업을 준비중인 S씨(41·연수원 33기)는 "불과 한 기 차이인데도 33기와 34기가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첫번째 연수생 1,000명 시대를 처음연 33기가 좋았던 옛시절의 희미한 그림자를 지니고있다면 올해 입소한 34기는 훨씬 냉정하게 상황파악을 한다는 것. 33기가 주로 연수원 밖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술자리도 자주 갖는 등 친목모임 활동을 활발히 한 반면 34기는 거의 전부가 식당을 이용하고 꼭 가야하는 자리가 아니면 저녁 술모임을 갖지않는다. 그래서 일산의 사법연수원 주변 식당가 주인들 사이에선 "34기는 해도 너무 한다"는 볼멘소리도 터져나온다.
성적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보니 상명하복의 관행도 많이 깨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폭탄주가 돌아가는 술자리다. C씨(36·연수원 34기)는 "교수님이 폭탄주를 돌리면 성별을 막론하고 무조건 받아마시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34기는 스스럼없이 거부한다. 술자리에서 많게는 반, 적어도 1/3 정도는 폭탄주를 받지않고 그냥 물만 홀짝 거리다가 자리를 빠져나온다. 공부를 해야하니까 술 안마시는 것이고, 교수님들도 현실을 아니까 강요하지는 못하는 분위기"라고 말한다.
서열파괴도 같은 맥락에서 벌어진다. 통상 두 기수가 함께 공부하게 되는 연수원에서는 윗 기수의 마지막 학기(4학기) 시험기간중엔 아랫기수가 도서관 자리를 내주는 것이 관례. 그러나 지난 10월 33기의 최종시험 기간에도 많은 34기 연수생들이 꿋꿋이 자리를 지켜 '예의를 모른다'는 비판을 받아야했다.
물론 연수원성적이 상위 30%안에 들지 못했다고 해서 '입신양명의 제1관문' 사시합격자의 위상이 한꺼번에 추락하는 것은 아니다. 수입이나 명성이 기대치에 못미치더라도 로펌이나 감사원 금융감독원 등의 행정기관, 민간기업체, 개업 등 활로는 여러가지다. 다만 앞으로도 매년 1,000명씩 쏟아져나올 법조인 시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숙제.
S씨는 "사실 아름다운 재단의 박원순 변호사처럼 욕심없이 살면 각종 시민단체 등 일할 곳이야 얼마든지 있다"면서도 "고시촌에서 공부할때는 그저 공부만 하면 됐으니까 오히려 행복했다. 지금은 공부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 더 힘든 것 같다"고 말한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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