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사법시험) 합격! 통지를 받은 그날로 동네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아들의 공부 뒷바라지로 허리가 휜 어머니는 홍안의 아들을 붙잡고 “우리 영감님 장하다”며 눈물을 뿌렸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찬사가 쏟아지고 가장 통속적인 장면이 여기저기서 연출돼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신고(辛苦)의 가족사가 절절이 배인 극적인 드라마였기 때문이다.마침내 고생은 끝났고 신분은 상승됐으며 권력과 명예, 그 필연적인 부산물로서의 부(富)도 손안에 들어왔다. 합격의 문이 좁은 만큼 감동은 배가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감동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의 다양한 법률서비스 요구에 부응한다’는 취지 아래 1995년까지 300명 안팎이던 사시 합격자수가 매년 급격히 늘기 시작, 2002년부터는 매년 1,000명이 시험관문을 뚫고 사법연수원에 발을 들여놓는다. ‘사시 1,000명 시대’의 첫 주자는 33기. 그들은 올 2학기로 4학기 2년제 전과정을 마치고 초조하게 임용결과를 기다리고있다.
사시 합격자가 급증하면서 입신양명 혹은 출세의 보증수표로 통하던 연수원생 신분도 빛을 바래고 있다. 연수원생의 30% 남짓만이 판ㆍ검사로 임용될 뿐, 나머지 70%는 중앙행정부처나 사기업에서 험난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때문에 사시의 관문이 1차(선택형)-2차(논술형)-3차(면접)-4차(연수원)로 확대됐다는 지적도 많다.
법과 양심으로 판결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뜨거운 피가 들끓는 한편에는 좋았던 시절은 다 갔다는 한탄도 나온다. 태반이 개인 비즈니스 차원의 변호사로 개업하는 집단에게 일률적으로 국가가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보면 사시 합격자를 보는 사회적 시선이 이미 한단계 다운그레이드됐다는 것이 실감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부여된 권한과 사회적 책무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12월 초면 올 사시 2차합격자가 발표되고 12월 말엔 면접이 실시된다. 위상과 전망, 모두에서 격변기를 겪고있는 사법연수생들의 현주소를 들여다본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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