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에서 경남 거창고하면 모르는 이가 없다. 대안교육의 표본이니 '첫눈 내리면 전교생이 책 덮고 토끼 잡으러 가는' 별난 학교라느니 하면서 말도 많다. 특히 이번 정권 들어서는 이 학교 교장을 지낸 전성은 선생(현 대통령직속 교육혁신위원장)이 교육부 장관 물망에 올라 더욱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거창고는 바른 사람을 길러내는 바른 교육의 전당일 뿐이다. 학교를 사실상 설립한 전영창 전 교장(1976년 작고)과 뒤를 이어 학교를 맡고 있는 그의 아들 전성은 교장이 그런 방식으로 학교를 일궜고 그들과 함께 40여년 학교재단 이사장을 맡아온 나의 신념도 다르지 않다.전영창 교장과의 만남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6·25가 끝난 직후 부천에서 풀무원공동체를 만들어 오갈 데 없는 이들을 거두고 있을 때 내가 몸담고 있던 동신교회와 같은 계통인 미국 형제(브레드린)교단에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 '전영창이라는 한국인이 갑자기 나타나 학교를 인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금한다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유교와 불교가 성한 거창이라는 지역에서 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하겠다는 데 혹시 아는 사람인가'라는 것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짤막하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곤 잊고 지냈는데 몇 달 후에 그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다 조국에 전쟁이 났다는 말을 듣고 졸업을 코앞에 두고 귀국(졸업장도 귀국 후에 받았다고 들었다)한 일부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와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차린 과거까지 털어놓던 그가 갑자기 "교육으로 조국의 미래를 밝히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며 내 손을 부여잡는 게 아닌가. 3∼4년 전에 개교한 거창고를 인수할 자금이 모자란다며 미국 교단에서의 모금활동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다. 그 때 이미 내가 한국교단의 대표격으로 소문나 있었던 터라 미국쪽에서는 나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도 그걸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어 미국교단에 '신뢰할 만할 사람'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넣었고 모금활동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 자금으로 학교를 인수한 그는 사실상 거창고의 설립자가 됐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나를 학교재단 이사로 끌어들였다. 당시 이사로는 그와 복음병원을 함께 했던 장기려 박사와 나를 포함해 5∼6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의 헌신적인 열정과 교육에 대한 순수한 의지에 감명받아 꿈에도 생각 못한 학교재단 이사가 됐다. 그런데 3년쯤인가 뒤에는 학교재단의 이사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사장은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돈도 없고 돈을 마련할 자신도 없다"며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그는 "돈은 내가 모금해서 벌어오겠습니다. 원장님은 올바른 교육을 하겠다는 내 생각을 곁에서 지켜주기만 하면 됩니다. 정신만 뒷받침해 주십시오"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설득에 이끌려 이사장직을 수락한 것이 40여년째 이어지고 있다.
거창고는 전영창 교장의 고집으로 처음부터 촌지없는 학교, 학생과 교사가 하나되는 학교로 출발했다. 그 뒤로 쌓인 학교의 명성은 온전히 그의 노력 덕분이다. 불의와 부정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그의 올곧은 성정이 지금의 거창고를 만든 것이다.
그가 학교를 인수 받은 뒤 학교의 모양새를 갖추어가던 시기는 정말 어려웠다. 교실이 없어 다 낡은 교회 건물을 빌려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비가 오면 우산을 받치고 수업을 진행해야 할 정도였다. 교사들은 월급을 제대로 받을 리 없었고 학생들과 함께 감자를 먹어가며 살았다는 고생담을 나중에 담담하게 들려주는 교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학교의 기틀을 잡는 데 가장 큰 애로는 행정적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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