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자동차 매연에 숨 막히고 경적 소리에 귀가 따가운 일상. 가을 하늘마저 고층 빌딩 숲에 가려 조각난 지 오래다. 인도를 걷는 일 조차 앞 뒤 사람과의 보폭에 신경을 써야 할 판이다. 하지만, 잠시만 눈을 돌려보자. 답답함을 안겨주는 곳으로만 여겨지는 도심에도 여유를 맛볼 곳은 있다. 마음껏 깊은 숨 들이켜도 찜찜하지 않고, 가장 느린 걸음으로 움직여도 눈치 볼 일 없는 곳. 돌담을 끼고 도는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종묘 길이 그런 곳이다. 마침 거리엔 낙엽이 쌓여 산책하기에 좋은 계절이다.경복궁 돌담길
청와대를 바라보고 있는 경복궁 신무문(神武門) 앞. 인도는 노랗게 변해 있었다. 쉴 새 없이 흩날리는 은행잎과 잿빛 담이 어우러진 모습은, 그대로 그림엽서 속 풍경이다. 남편과 연애할 때부터 자주 찾았다는 이순영(55·여)씨는 "쭉 뻗은 회색 빛 담을 보며 걷다보면 한없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했다. 이씨와 함께 찾은 대학동창 노희정(55·여)씨는 "가을마다 이 곳을 찾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 멀리 단풍구경 갈 필요를 못 느낀다"며 웃었다.
청와대의 위엄 덕이랄까. 출퇴근 시간을 넘긴 왕복 4차로 도로도 한적한 편이다. 게다가 돌담을 끼고 도는 보도 역시 충분히 넓어 얼마간 문명과의 격절감도 맛볼 수 있다. 삼청터널길 들머리까지 이어진 길 건너 인도에는 짱짱한 맛 집들이 요란스럽지 않게 줄 지어 있다. 출출한 배를 채울 수도, 따뜻한 차로 몸을 데울 수도 있다. 전직 대통령들의 소장품을 전시한 '효자동 사랑방'과 알찬 전시로 유명한 대림미술관도 경복궁 돌담길과 이웃하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
경복궁 돌담길에 비하면 덕수궁 돌담길은 제법 북적거리는 길이다. 호젓함 대신 건강한 생기를 느끼기에는 덕수궁길이 낫다. 낙엽을 내던지며 뛰노는 아이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어머니들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가 있다. 점심 식사 후 동료들과 담소하는 직장인들의 표정 역시 밝아 보인다.
이현경(25·여)씨는 "잠깐 동안 돌담길을 걸으며 생각도 정리하고 동료들과 얘기 나누고 나면 오후엔 일이 잘된다"고 말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걷다 옛 대법원 자리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에 들러 그림을 관람하거나, 잠시 넋을 놓고 미술관 앞 뜰에 앉아보는 것은 어떨까. 대갓집 정원처럼 꾸며놓은 정동공원을 찾거나 고종이 피신했던 옛 러시아 공사관 자리에 올라 시내를 조망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거리다.
종묘 돌담 순라길
순라꾼들이 순찰을 돌던 이 길에는 오른편 담장 너머로 가지를 늘어뜨린 아름드리 나무가 있다. 바람이라도 불어준다면 나무들이 떨구는 낙엽비를 맞을 수도 있다. 담장이 높아 위압적이긴 하지만, 긴 세월 풍상의 위엄에 무람없이 손때를 묻혀보는 것도 좋다. 담 너머에는 고즈넉한 종묘사직(宗廟社稷)이 펼쳐져 있다. 길 왼쪽 귀금속 상가들 사이사이에서는 구수한 입담의 음식점 주인들이 손님을 기다린다. 듬뿍듬뿍 담아주는 순대국밥 한 그릇으로 든든히 배를 채운 후 다시 걷다 보면 어느 새 창덕궁 가는 길과 맞닿는다.
그 밖의 돌담길
우거진 나무와 나란히 굽은 창경궁 홍화문(弘化門)에서부터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에 이르는 돌담길도 흔치 않은 길이다. 창덕궁과 현대 계동 사옥 사이의 돌담길은 주변 한옥촌과 불교미술관도 구경할 수 있어 좋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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