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10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청뢰(靑雷) 이강훈옹은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건국 후에는 민주화 활동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평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독립·건국 운동사의 산증인이다.1903년 6월13일 강원 김화군에서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3·1 독립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선생의 길고 긴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이듬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그는 25년 김좌진 장군 휘하의 항일전선에 투신, 국내 동지들과의 연락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북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에도 가담해 활동하던 중 중국경찰에 체포돼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26년 김좌진 장군의 지시를 받아 백두산 근방의 신창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가르친 데 이어 29년에는 흑룡강성 해림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를 조직, 동신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피 끓는 열망 탓에 그는 학교 안에만 머물지 못했다.
30년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33년 일제의 주중공사 아리요시(有吉明)가 친일파 중국 정치인들을 매수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는 정보를 듣고 '흑색공포단'을 조직, 살해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권총과 폭탄,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아리요시 공사를 살해하기 직전 일경에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고 일본 도쿄로 이송돼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광복으로 출소했다.
선생은 광복 이후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으로 일하다 60년 귀국, 한국사회당 총무위원으로 활동했으나 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민주화 활동 혐의로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67년 다시 귀국한 선생은 79년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편찬실장 등을 역임했으며,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장(83년), 민족화합추진위원(88년), 백범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 회장(92년) 등을 맡았다. 77년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심의위원으로 활동하다 그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88년부터 5년간 제10대, 제11대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해외독립운동사, 항일독립운동사, 독립운동대사전 등이 있으며, 유족은 부인 이병환(58)씨와 아들 이승재(30)씨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생의 장례식에 명예장례위원장직을 맡았다.
/김정호기자 azu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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