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디다.> 수필 '매화'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매화가 핀 묘사와 '가난한 살림' '운치' 라는 예스러운 말들이 읽기를 재촉했다. <실례의 말씀이오나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청하신 선생의 말씀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도, 실은 선생을 대한다는 기쁨보다는 댁에 매화가 성개(盛開)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요, 십리나 되는 비탈길을 얼음 빙판에 코방아를 찌어가면서 그 초라한 서재를 황혼 가까이 찾아갔다는 이유도, 댁의 매화를 달과 함께 보려 함이었습니다.…> ■ '매화'는 월북으로 잊혀졌던 근원 김용준의 수필집 '근원수필'의 맨 앞을 장식한 글이다. 88년 가을 1,000원짜리 문고판을 받고 별 생각 없이 읽다가, 그만 놀라고 말았다. 김용준은 누구인가, 왜 이름조차 몰랐단 말인가. 그냥 지나쳤던 시인 민영이 쓴 발문을 다시 읽고서 대충 전후사정을 알았다. 시인은 우연히 부산 피란시절에 노점에서 '근원수필'을 사 틈틈이 애독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잃어 버리고 말았다. 30여년이 지나 제주도에 여행을 갔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출판까지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맥박이 멎는 듯한 기쁨! 그것을 어찌 말로 다하랴.> 책과 재회하는 그의 감격은 그렇게 컸다. 맥박이> 실례의> 댁에>
■ 지난 주 대입 수능시험을 앞두고 인터넷상에 백석의 시와 김용준의 '근원수필'이 지문으로 나올 것이란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실제로 언어영역에서 두 월북문인의 글이 모두 출제되어 논란을 빚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긴 하겠으나, '근원수필' 이 불미스런 일로 인구에 회자된 셈이다. 개운찮은 뒷맛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보석 같은 수필집이다. 출제된 수필 '게(蟹)'는 화가이기도 한 근원이 게와 사람의 특성을 비교하는 해학과 관조의 글이다. 게는 그림을 기꺼이 보내고 싶은 이에게도 좋은 화제(畵題)가 되고, 뻔뻔스럽고 염치 없는 친구에게도 보낼 수 있는 좋은 화제라는 얘기다.
■ 경북 출신인 근원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나와 서울대·동국대 교수로 재직했다. 1950년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67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미술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 납·월북 문인이 해금되어 근원과 '근원수필' 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의 글은 수묵화처럼 그윽하고 고담하며, 그가 좋아한 늦가을 감나무처럼 호젓하고 넉넉하다. 탄생 100년인 내년에 그가 재조명 되었으면 한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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