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고수가 만났다. 눈물샘을 바닥까지 쥐어짜게 하는 연기자 최민식(41)과 스타일리스트 감독 박찬욱(40)이 함께 한 자리엔 고압전류라도 흐를 법한데 웃음만 번졌다. 서로 멀찌감치서 흠모했던 이들은 애정이 담긴 웃음을 주고 받았다. 영화 '올드보이'(21일 개봉)와 두 사람을 몇 가지 키워드로 풀어 보았다.5―10―15
'올드보이'는 15년 간 이유도 모른 채 갇혔다가 풀려난 한 남자 오대수(최민식)가 5일 동안 자신을 가둔 이우진(유지태)을 찾아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원작인 일본 만화에서는 감금 기간이 10년이지만, 영화는 15년으로 기간을 늘렸다.
'왜 감금 기간을 늘렸느냐'고 묻자 박 감독은 "길면 길수록 처절하지 않나?"라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최민식은 "감금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TV 한 대가 있어요. 먹고 자고 자위행위하고 자살 시도하고…. 이성을 차린 뒤에야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고 받았다. 최민식에게 만약 실제 갇힌다면 뭘 하며 지낼 거냐고 물었다. "비슷하겠죠…. 그래도 자위행위는 하겠죠."(웃음)
복수
왜 복수극인가. 박 감독으로서는 '복수는 나의 것' 이후 다시 복수극이다. 그는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분노할 일이 많이 생기는데도 직접 해소할 방법은 없다"고 설명했다. "끓어오르는 걸 폭발하고 싶을 때, 갑자기 자다가 일어나서 터뜨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최민식은 "저한테 그러실 건 아니죠?"라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리고 따뜻한 눈동자를 보면 최민식과 복수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화가 치밀어 올라도 그 사람이 불쌍해 보이면 금세 사그러들어요. 그게 제 본래 성격이에요." 박 감독은 이런 최민식의 따뜻한 면 때문에 영화가 복수극임에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분노와 연민
박 감독은 분노가 자신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최민식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연민이 자신을 움직인다고 했다. "낙엽진 거리 위를 양복을 잘 차려 입은 할아버지 두 분이 팔짱을 끼고 함께 걸어가시면서 파안대소하는 걸 봤어요. 거기에서 뭔가 확 왔어요.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할머니도 아니고 할아버지들이. "박 감독은 "연민이 있으니까 불쌍한 자를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분노도 생기는 것"이라고 거들었다.
40, 불혹 또는 올드보이
'올드보이'란 제목은 원작 만화 그대로다. 박 감독은 '올드'와 '보이'의 서로 다른 말이 어울리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둘은 40대를 갓 넘긴 올드보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도 전지현, 차태현과 하고 싶다"(박찬욱), "나도 젊은 여자 감독과 하고 싶다"며 '올드'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최민식은 박 감독이 '자기만의 세계를 또렷한 어조로 논리 정연하게 펼친 세계'를 좋아해 왔다며 '끌리지요. 여자에게 끌리듯이'라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했다. "몇 마디 안 했는데도 끌렸어요. 외모는 조금 아니지만."(웃음)
박 감독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명배우, 연륜과 고뇌가 밴 풍모와 원형적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배우를 데리고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 해냈다. 최민식은 욕을 해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처럼 들리게 하는 배우"라고 화답했다. 두 사람은 불혹의 나이에, 서로의 매력에 기꺼이 유혹 당하는 쾌활한 올드보이였다.
군만두, 그리고 '악행의 자서전'
"15년 먹은 맛을 어찌 잊겠냐." 오대수가 던지는 말이다. 중국집 군만두는 이 복수극의 주요 모티프다. 감금방에서 최민식에게 나오는 유일한 음식은 군만두. "메뉴를 다양하게 했으면 감금방에서 안 나가려고 했을 텐데."(최민식)
오대수가 감금방에서 적어 내려가는 참회록인 '악행의 자서전' 또한 '올드보이'를 흥미롭게 하는 요소이다. "주로 여자 문제지, 뭐겠어요. 직접 다 쓰셨거든요." 박 감독이 이죽거리자 최민식은 "남자들이 참 여자에게 잘못하며 살잖아요"라고 애써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박 감독은 어림없다는 듯 "다 그런 건 아니죠"라고 일축했다.
감금방 vs 행복
두 사람의 개인적 '감금방 시대'는 언제였을까. 박 감독은 뜻하던 영화가 잘 안 돼 평론가로 지내던 시절을 꼽았다. "남의 영화에 대해 쓰니까 미칠 노릇이었고 영화 계약이 잘 안되니 충무로가 다 짜고 나를 곯려 먹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최민식은 7∼8년 간 타성으로 지냈던 TV 탤런트 시절이라고 말했다. "일수 찍듯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두 사람은 그럼 언제 행복을 느낄까. 박 감독은 "가족과 있을 때, 그리고 촬영을 하면서 생각지도 않던 배우의 연기가 나올 때"라며 최민식을 보았다. 최민식은 '파이란'을 보고 나온 중년 관객이 등을 두드리며 "수고했어"라고 말했을 때 "미약하나마 소통이 된 것 같아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아직 영화의 매력에서 빠져 나올 생각이 없는 올드보이였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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