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화마당]"타인의 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마당]"타인의 피"

입력
2003.11.11 00:00
0 0

노동자의 잇단 자살과 화염병 시위 소식 속에, 시몬느 드 보봐르의 '타인의 피'를 펼친다. 2차대전 전후의 시대불안 속에 프랑스 젊은이에게 새로운 실존주의 철학과 정신적 지표를 심어준 소설이다. 부르조아 집안 출신으로 공산당원이 된 장은 자신의 숭배자인 친구 동생 자크의 죽음 앞에서 절망과 고뇌에 빠진다. 그는 타인의 생명을 어떻게 책임지며 보상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懷疑)와 자책 끝에 탈당하고, 순수 노동운동에만 전념한다.<행복했다. 깃발은 펄럭였고 군중은 노래하고 있었다. 작업장의 동지들, 말 안 하던 사람들, 말하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무 일도 모두가 내 어깨를 쳤고, 서로의 두드렸고, 손에 손을 마주잡았다. 우리들의 축제…>

시대는 젊은 지성을 내버려두지 않아, 장은 다시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투신하게 한다. 이번에는 동지이자 사랑하는 여인 엘렌의 죽음에 맞닥뜨리게 된다. 정치도 종교도 믿을 수 없는 상실과 불신의 시대를 헤쳐가는 젊은이의 몸부림이 처절하다. 그러나 소설의 저변에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라는 철학적 사유가 흐르고 있다.

이 소설이 국내에 번역된 것이 1970년대다. 개발독재 시대로 불리는 그 무렵, 우리 노동현실은 가혹했다. 조직적 노조운동에 먼저 불을 붙인 것은 여성이었다. 76년 파업 중인 동일방직 여성 노조원 500여명은 무장 진압경찰에 거의 알몸으로 저항했고, 78년에는 인분 세례를 받는 극단적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80년 다시 신군부가 등장하자 거센 민주화운동이 일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공단에 '위장취업'한 대학생들이 노동자를 의식화 시켰다. '못 배워 한 많던' 여성 노동자들은 쓰라린 과정을 거치며, 인간적 존엄과 노동자적 자각에 눈떠 간다. <전 공순이란 말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라인에서 내가 빠져 버린다면 라인은 큰 지장을 가져 옵니다. …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힘이 난 공순이입니다.>

남성이 노조운동의 본격적 주체로 등장한 것은 87년 6월 민주화투쟁 이후다. 90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까마득히 높은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파업을 벌였다. 노동운동의 성격이 여성적인 것에서 남성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여성이 너무 평화적·방어적이었다면 남성은 지나치게 전투적·공격적이 되었다.

최후의 선택이자 절규인 자살이 잇달고 있지만, 노사정(勞使政)은 모두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노조원의 가장 큰 고통이 손해배상과 급여가압류에 따른 생활고다. 정부는 손배·가압류 시 최저임금은 보장되도록 제도개선을 밝히고 있지만, 노조는 공공부문에서 400억원의 고소를 취하하지 않는 정부를 불신하고 있다. 경제단체들은 파업방지를 위해 손배·가압류 유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정부와 경제계는 노동자의 처지를 더 깊이 헤아려야 한다. 손배·가압류는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에게 치명적인 형벌이다. 극한상황에 몰린 사람은 '자기파괴'로 도피하게 되며, 그 파괴력은 사회와 국가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 손배·가압류는 절차를 엄격히 해서 폭력·기물파손 등으로 직접피해를 입혔을 경우에만 적용해야 형평에 맞을 것이다.

비극을 투쟁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노조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노조원 간에 유대감은 적고 경직돼 있는 것은 아닌지, 붉은 머리띠가 상징하듯 대의명분과 과격 일변도는 아닌지를 살펴보았으면 한다. 또한 책임감 많은 간부를 너무 오랫동안 고독과 고통 속에 방치한 것은 아닌가 하는 내부적 요인을 둘러보아야 한다.

세상은 나아진다는데 반목은 더 깊어지고 '타인의 피'는 계속 흐르고 있다. 사회에서 비인도적·적대적 관계가 지속되는 한, 우리가 발전시켜온 경제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박 래 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