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조용한 날이 있었냐마는, 우리 사회가 사방에서 요동을 치고 있다.대선자금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비리 의혹에 대한 특검법이 추진되고 있는가 하면 정치권은 생존을 위해 때늦은 정치개혁의 제스처를 쓰고 있다.
정치권 밖에서는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결사태가 드디어 6년 만에 화염병이 등장한 대규모 폭력시위로 발전하고 말았다. 천문학적 숫자의 손해배상 청구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고려할 때 그 절망감은 이해하지만 결국 문제의 핵심은 여론이라는 점에서 화염병이 노동자들의 올바른 선택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정부가 노동자 자결사태에 강금실 법무부장관 등의 합동담화를 통해 미봉책으로 대응한 것도 문제다.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노동자들을 자극한 것은 노동자들에게 화염병을 들라고 고사를 지낸 것에 다름 아니다. 노 대통령은 지난 주 국무회의에서 강 장관 등이 "노동자들이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자신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지 못하고 노동자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심하게 질책했다.
아무리 노동자들의 분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군사독재시절도 아니고 지금처럼 민주화된 시대에 분신이라니"하는 식의 오만이 아니라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표해주는 덕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답답한 일이다.
정치권을 들여다봐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최도술씨 사건이 터져 나올 때만 해도 검찰을 칭찬했던 한나라당이 SK대선자금 등 자신에게 불리한 국면으로 넘어가자 검찰의 중립성에 시비를 걸고 나서고 있다. 한나라당이 코너에 몰리자 검찰을 칭찬하던 열린우리당은 검찰의 정대철 의원 소환소식이 전해지자 검찰을 비판하고 나서는 등 여야가 모두 정략적인 태도로 대응하고 있다.
노 대통령 측근비리 문제만 해도 여야가 이성과 정치력을 가지고 문제를 슬기롭게 풀 수 있는데도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대통령 측근비리 문제는 사안의 성격상 충분히 특검의 대상이 될 만한 문제다. 그러나 현재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결과를 지켜보고 특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정도이다.
따라서 여야 지도자가 마주앉아 법사위를 통과한 특검법안의 본회의 상정을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이후로 유보하되, 발의자인 한나라당이 수사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경우 특검에 협력한다는 식의 합의를 이끌어냈어야 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북새통을 틈타 위기에 몰린 정치권이 적당한 타협을 통해 문제를 피해가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한나라당의 홍사덕 원내총무가 느닷없이 중대선거구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중대선거구제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주장해온 제도이지만, 이 당들의 전신인 국민회의의 강령에 잘 요약되어 있듯이, 당내파벌이 성행하고 막대한 선거비용이 들며 신진인사의 진출을 가로막는 등 부작용이 커 세계적으로 폐기하고 있는 제도이다.
그 같은 이유로 정치개혁국민행동 등 주요 시민단체들은 이에 반대하며 독일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중대선거구제는 여야의 동반 당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대선자금과 관련하여 다음 총선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수도권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갑자기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이 같은 홍사덕파문은 한나라당이 소선거구제 당론을 재확인함으로써 일단락이 됐다. 그러나 실제 중대선거구제 법안이 상정될 경우 반란표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대선자금 수사 등으로 세상이 어수선하고 국민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정치권이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두 눈을 부릅떠야 한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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