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회의는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비정부기구(NGO)대표 3만여명과 정부대표 수천명이 인류와 지구의 환경과 미래를 논의하는 장에는 국경과 인종의 차별도 없었다. 환경문제는 이제 지구인이 함께 지고가야 할 공동숙명이 된 듯 싶었다.내가 준비한 한국의 유기농 현황에 대한 발표는 리우시내의 큰 공원에서 진행됐다. 행사는 발표자와 청중들로 행사장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한 가운데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발표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10여분 남짓이었다. 내 순서에서 나는 준비한 한국 유기농의 성과와 현황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내려왔다. 동행한 유재현 박사의 '수고하셨습니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여러국가의 참가자들이 몰려와 이것저것 묻고 답한 기억이 난다.
리우회의 참가는 내가 유기농에 더 천착하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됐다. 그 때까지는 유기농산물을 단지 몸에 좋은 음식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환경과 연관지었을 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기농은 생명환경을 개척하는 지름길이라는 확신도 갖게 됐다. 리우회의가 인류를 위협하는 물이나 공기의 오염을 어떻게 방지할까를 논의하는 장이었다면 나에게 리우회의는 농약과 화학비료에 오염되지 않은 유기농산물을 어떻게 선전하고 보급할까를 고민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나는 그러나 다시 농사꾼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에게는 땅이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전도(傳道)하는 농부가 나의 천직이었다.
그렇게 그 해가 저물어가던 11월의 어느날 유 박사가 나를 찾아와 "경실련에 환경개발센터라는 환경단체를 만드는데 원장님께서 이사장에 취임해 주셔야 겠습니다"며 청을 넣었다. 경실련의 고문을 맡을 때처럼 사양했지만 유 박사는 이미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원장님께서 풀무원공동체를 이끌고 정농회를 결성해 유기농법을 실천해 온 것은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리우회의의 환경약속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원장님께서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해주셔야 합니다"며 유 박사는 한편으로는 나를 추켜세우면서 완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바람에 나는 환경개발센터의 초대이사장이 됐고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사장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사장직을 떠맡기는 했지만 실제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유 박사의 말대로 '정신적 지도자'역할인 얼굴마담이라고나 할까. 단체의 사업을 총괄지휘하는 역할은 대표 몫이었다. 처음 센터의 대표는 권태준 서울대 교수가 맡았고 지금은 이정전 서울대교수가 이어받았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대표도 단체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
당시만 해도 환경운동이나 환경단체가 그리 익숙하지는 않았다. 환경하면 화단가꾸기나 주변청소 등을 떠올리는 게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환경단체도 '공해추방운동연합'이 막 발족한 정도였고 환경개발센터가 출범한 이듬해 환경운동연합이 생겨났다. 나도 사실상 당시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의식수준에서 출발한 것 같다. 지금까지 환경개발센터가 이룬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현장에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대낀 활동가들에게 돌릴 일이다.
환경개발센터는 이런 상황에서 심도있는 연구를 통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행동하는 단체로 출발했다. 지금까지 음료포장용기 재활용 촉진을 위한 제도개선, 삼림보존 워크샵, 그린벨트 살리기 국민행동 등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집회나 시위 등의 직접 행동에도 나서지만 워크샵이나 토론회 등을 통해 대안적 정책을 생산하는 데 더 역점을 두고있다. 지금은 환경정의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경실련에서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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