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혜숙(사진)과 금보라라는 배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여전히 '이쁜이'인 그녀들이지만, 당대의 그녀들은 가히 천상의 아름다움이었다(적어도 한참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나에게는).최근 '나는 달린다'(MBC)에서 철 없는 가정주부 역을 맡은 이혜숙과 '대장금'(MBC)에서 임현식과 찰떡궁합 연기를 보여주는 금보라는, 지금은 괄괄한 아줌마가 되어 남자들에게 큰소리 뻥뻥 치지만 과거엔 가련한 여인이었다.
몇 편의 멜로드라마에 출연한 이혜숙이 영화배우로서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 첫 영화는 하명중 감독의 '태'였다. 무속적 냄새가 짙었던 이 영화에서 그녀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어느 섬마을에 평화를 가져온다. '유혹시대'처럼 섹시하고 모던한 느낌의 캐릭터도 있었지만 아마도 이혜숙 최고의 영화는 '은마는 오지 않는다'일 것이다. 영화에서 그녀는 '역사의 희생자'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강원도 산골의 순박한 여인 언례는 미군에게 겁탈 당하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는다. 그녀는 먹고 살기 위해 '양공주'의 길을 택하고 전쟁이 깊어지자 마을을 떠난다.
금보라는 '도시의 희생자'였다. 검열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영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그녀는 주택 분양권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염전의 빈민이다. 아마도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을 '장사의 꿈'에서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눈물겹다. 어촌 출신인 그녀는 먹고 살려고 서울에 올라왔지만 포르노 배우와 여공과 스트립 걸을 전전하며 시들어간다. '늑대의 호기심이 비둘기를 훔쳤다'에서도 그녀는 무작정 상경해서 사기꾼에게 이용 당하는 순진한 여자다. 금보라의 80년대 영화 경력에서 도시는 지옥인 셈이었다.
여기서 그녀들의 육체는 마치 '순교 당한 성자의 알몸'처럼 제시된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강간 장면. 언례를 범한 미군은 문 밖으로 사라지고, 그녀의 나신은 하이 앵글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장사의 꿈'의 라스트 신. 스트립 걸이 된 그녀는 무대 위에서 죽어간다. 뒤늦게 그녀를 찾은 연인은 마치 시위하듯 싸늘히 식어가는 그녀의 벗은 몸을 들고 사람들 앞에 서 있다. 어쩌면 그녀들의 몸은 하나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에로티시즘만이 육체를 지배하던 시절, 그녀들은 가혹한 마초의 세계에서 희생자의 몸짓을 드러냈다. 본 지 10년이 넘어 20년이 다 돼가는 영화의 그 장면들이 아직도 또렷한 것은 그녀들의 육체를 통해 환기되는 거대한 의미 때문일까? 요즘 별 의미 없이 벗어 젖히는 누드 열풍 속에서 '풍요 속의 빈곤'을 느끼는 건, 살색 파노라마 이면에 존재하는 '의미의 공허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김형석·월간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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