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총선에서 정권 구도의 열쇠를 쥔 정당은 종교단체 창가학회(創價學會)를 모태로 한 공명당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됐다.연립3여당 중 자민당이 247석에서 237석, 보수신당이 9석에서 4석으로 줄었지만 공명당은 31석에서 34석으로 의석을 늘렸다. 더 중요한 것은 야당인 민주당 후보와 격전을 치른 소선거구에서 공명당 표가 자민당 후보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창가학회가 주장하는 공식 회원수는 821만 세대. 선거전문가들은 300개 소선거구당 평균 2만∼3만 표를 공명당 고정표로 보고 있다. 공명당의 비례대표 총득표수도 2000년 중의원 선거 때(776만 표)보다 훨씬 많은 873만 표로 늘었다.
공명당은 소선거구에 10명의 후보만 내고 비례대표에 주력했다. 자민당 지역구 후보들에게 표를 몰아 주기 위한 것이다. 1만∼2만 표 안팎에서 승부가 갈리는 격전구에서 똘똘 뭉친 공명당 표가 없었다면 자민당 후보 상당수는 떨어졌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1990년 이래 단독으로 과반수를 얻지 못한 자민당은 총선 때마다 30석 전후를 유지하는 공명당과 손을 잡지 않고는 연립정권을 구성할 수 없다. 민주당도 이번 선거에서 최대 목표치인 200석을 얻었더라도 공명당이 돌아서 주지 않는 한 반(反) 자민 연립정권 구성은 불가능하다. 공명당이 자민당 정권의 '생명 유지 장치'인 셈이다. 불교 종파인 일련정종(日蓮正宗) 계열 신자단체에서 출발한 창가학회는 군국주의 시절 천황제와 전쟁에 협조하지 않아 탄압받다가 2차 대전 이후 재건됐다. 60년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75) 3대 회장이 취임하면서 핵무기 반대, 개헌 반대, 정치 정화 등을 내걸고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공명당은 창당 3년 만인 67년 중의원 선거에서 25석을 확보한 이래 93년 자민당을 배제한 호소카와(細川) 연립내각에 참여하는 등 반 자민 노선을 견지하다가 99년 8월 자민·자유·공명당 연립정권에 참여하면서 친 자민 노선으로 돌아섰다. 일본 정치가 신당 창당과 연립정권 발족으로 요동칠 때마다 캐스팅 보트를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도쿄=신윤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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