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 중에는 웃어른을 잘 모시고 친척들을 잘 보살펴 효부상을 받으신 분도 계셨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치신 분도 계셨습니다. '상수도 조상의 훌륭한 점을 알고 본받아야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상수는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집안의 조상이 자랑스러웠습니다." 90년대 초등학교 2학년 '바른 생활 이야기'에 나오는 족보의 내용 일부다. 상수는 증조부의 제삿날 할아버지로부터 족보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같이 다짐한다. 7차 교육과정 교과서에선 이 내용이 빠졌지만 족보를 대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말해주고 있는 글일 것이다.족보는 마음의 고향이다. 조상은 마음의 고향을 지키는 등불이 되어 후손이 나아갈 길을 밝혀준다. 대다수 한국인은 그렇게 믿는다. 대전 동구 중동의 회상사(回想社), 바로 족보문화의 산실이다. 한국 최초의 족보전문출판사로 내년이면 창업 50주년을 맞는다. 고령(高靈) 박씨 대종회장과 성균관 부관장을 지낸 창업자 박홍구(朴泓九·81)옹은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한다. 셋째 아들 병민(炳敏·49)씨가 감사로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족보는 자기의 뿌리이자 민족사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한 씨족의 계보정리의 중요성은 비단 그 씨족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씨족의 구성원들이 반만년 우리 역사의 일부를 이뤄왔기 때문이지요." 박옹에게 족보제작은 전통문화의 재발견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인 것이다.
한국의 성씨는 280여개, 관향본(寬鄕本)은 800여개, 파를 따지면 3,400여개에 달한다. 회상사는 대동보(大同譜) 500여종, 파보(派譜) 1,500여종, 가승보(家乘譜) 900여종을 발간했다. 반세기에 걸쳐 찍은 족보만 줄잡아 600만부가 넘는다. 전국 족보출판의 90%를 회상사에서 담당해 왔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평가다.
역대 대통령의 문중도 거의 예외 없이 회상사에서 족보를 만들었다. 고(故) 윤보선(尹譜善) 전대통령은 1983년 해평(海平) 윤씨 대동보 발간에 맞춰 회상사를 찾아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고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도 75년 고령 박씨 대동보 발간 때 '친화(親和)'라는 친필 휘호를 써서 내려 보냈다.
"오래 전 일인데 한 번은 50대 초반의 신사가 고급 외제차를 타고 찾아왔어요. 사업에 힘을 쏟아 여러 개의 기업체를 거느린 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자신의 뿌리를 모른다는 겁니다.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는 그는 맏딸의 혼사를 준비하던 중 신랑될 집에서 족보에 대해 묻자 당황한 나머지 명문가의 족보에 자신의 일가를 끼워 넣어줄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물론 거절했습니다."
족보를 신분증명서로 여기는 사람을 대할 때 박옹은 가장 곤혹스럽다. 족보는 조상의 현창에 앞서 조상을 올바로 알기 위해 제작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큼 사실만을 담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옹이 공무원 생활을 접고 회상사를 차린 때는 54년. 첫 결실로 경주(慶州) 이씨 국당공파(菊堂公派)의 파보가 나왔다. 74년 찍어낸 덕수(德水) 장씨의 족보는 양장제본의 출발을 알렸다. 내용이 방대한 족보로는 김해(金海) 김씨 삼현파(三賢派)의 대동보(37권), 경주(慶州) 이씨 대동보(34권) 등이 꼽힌다.
족보제작은 사회변화를 반영하기도 한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한지에 실로 꿰맨 족보가 주류였는데 80년대 이후 양장본으로 바뀌었다. 컬러사진을 곁들이는 족보도 늘어나고 있다. 한글족보의 등장은 70년대인데 함평(咸平) 이씨 목사공파(牧使公派), 한산(韓山) 이씨 사복시정공파(司僕寺正公派) 등이 한글전용 족보를 편찬했다. 회상사의 족보는 미국 하버드대,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서 구입할 정도로 서구에서 한국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①족보 내용이 인쇄된 파지는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②인쇄된 용지는 밟고 다니지 않는다 ③항상 족보를 모신다는 용어를 쓴다.' 회상사의 직원들이 준수해야 할 3대 원칙이다.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병민씨는 무역업 등을 거쳐 90년부터 부친을 돕기 시작했다. 두 형은 가는 길이 달랐다. 큰형 병호(炳浩)씨는 대전시 동구의 초대 민선구청장을 지낸 뒤 약국을 경영하고 있고 둘째형 병석(炳錫)씨는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병민씨는 형제중 누군가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부친의 생각을 따랐다.
"족보는 전통문화의 진흥과 다음 세대를 올바로 교육, 육성하는 지침서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작방향과 내용의 대중화와 현대화가 필요합니다." 병민씨는 그래서 족보제작의 컴퓨터화에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것은 덕행이지 가문이 아니다. 족보의 역기능을 경계한 말일 것이다. 박옹은 족보제작을 필생의 업으로 삼아오면서 이 말을 늘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 족보의 유래
족보는 중국 한나라 시대 왕실의 제왕년표(帝王年表) 기술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는 고려 중기 의종 때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효시로 기록돼 있다.
왕실을 제외할 경우 최초로 간행된 민간족보는 1423년(세종 5년) 나온 문화(文化) 류씨의 영락보인데 기록으로만 전한다. 현존 최고족보는 조선 명종 17년에 제작된 문화 류씨의 가정보(嘉靖譜)다. 이 보다 앞서 제작된 안동(安東) 권씨의 성화보(成化譜)는 서문만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대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만든 소보(蘇譜)를 민간족보의 효시로 삼는다.
한국의 성씨는 중국문화를 수용하면서 형성됐다. 삼국시대의 대표적 성씨를 보면 고구려는 고(高) 해(解) 을(乙) 송(松) 주(周) 마(馬) 창(倉) 동(董) 연(淵) 을지(乙支), 백제는 사(沙) 연(燕) 협(協) 진(眞) 국(國) 목(木),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이(李) 최(崔) 정(鄭) 손(孫) 설(薛) 배(裵) 등이다.
지배계층의 인명이 중국식 한자로 바뀐 시기는 신라 경덕왕 때이다. 신라의 김춘추 김유신 등은 당시 지배계급의 이름이다. 궁예 삼능산 복사귀 등 순 우리말 이름도 신라 말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삼능산과 복사귀는 태조 왕건을 추대한 공으로 신숭겸(申崇謙)과 복지겸(卜智謙)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 받는다. 신숭겸은 평산 신씨, 복지겸은 면천 복씨의 시조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본격적인 보급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이 때부터 지배계층은 중국식의 성과 이름을 사용했는데 특히 태조 왕건은 개국공신 등에게 사성(賜姓)을 했다. 성씨 체계는 조선시대 더욱 다양해졌으며 중국식의 한자성은 왕실 귀족 관료 양민 천민의 순으로 보급됐다. 조선 전기만 해도 성씨를 갖지 못한 평민과 노비는 전인구의 90%나 됐다.
무성(無姓) 계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 화척, 향·소·부곡민과 역민 중 일부는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을 통해 성씨를 획득했다. 하지만 천민계층에게 성씨가 본격 보급된 시기는 조선후기였다.
1894년 갑오경장은 종래의 신분·계급 질서를 타파, 성씨의 대중화를 촉진했다. 이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1910년 민적법의 시행과 더불어 누구나 성과 본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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