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외무장관은 이라크 전쟁 전 유엔 안보리 연설 등을 통해 미국 주도의 이라크전 강행에 맹렬히 반대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그가 요즘은 "지금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는 것은 큰 재난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하며 세계 각국이 이라크 안정을 위해 강력한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반전동맹을 주도했던 그가 갑자기 친미로 돌아선 것은 물론 아니다. 권력 공백상태에 빠진 이라크에서 점령군인 미·영군이 철수할 경우 일어날 혼란과 그 여파의 심각성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고 있을 뿐이다.
이라크 상황이 더욱 나빠지면 그것은 이라크 내부의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종교 및 민족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주변 중동 국가들이 직간접적으로 분쟁에 휘말려 들면서 중동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 개연성이 농후하다. 세계 석유 공급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중동의 불안은 또 한번의 오일 쇼크를 초래할 수 있고 이슬람세계의 동요로 증폭된 테러 에너지는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훨씬 불안케 할 것이 뻔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세계 각국이 이라크 안정을 위해 강력한 공동보조를 취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 자명해진다.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 등 이라크전에 반대했던 나라들도 이라크의 조기 안정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 이라크에서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자국의 병사들을 희생시키며 홀로 고전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테러세력을 두려워 해 이라크에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호언했지만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라크는 현재 미군 사상자 수나 전투 규모로 볼 때 사실상 전쟁상황으로 되돌아갔지만 미군은 이렇다 할 반격을 못한다. 병력 과잉전개(over-stretch)로 인한 병력교체가 지연,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돼 있고 내년 대선을 의식해 병력을 줄여야 할 판이다. 그 공백을 이라크군을 재건해 메울 계획이지만 아직은 요원한 얘기다. 이런 약점을 간파한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은 더욱 빈번해지고 대담무쌍해지고 있다.
미국은 다국적군의 파병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파병에 관심을 보였던 동맹국들이 최근 이라크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면서 하나 둘씩 발을 빼고 있다. 1만 명 가량의 파병이 예상됐던 터키가 최근 파병 결정을 철회했고 파키스탄은 유엔 이라크 결의안의 불충분성을 들어 파병 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자위대 파병을 약속한 일본의 경우도 이번 총선에서 집권 자민당의 부진으로 파병 신중론이 힘을 얻을 전망이다. 미국은 잘 훈련돼 있고 미군과 연합작전 훈련 경험이 많은 한국군의 파병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지만 파병 반대 여론 확산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다. 이라크에서 미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한 두 나라의 추가 파병으로 저항세력의 기세를 꺾기 힘들고 괜한 인명피해만 늘릴 수도 있다.
미국은 이런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라크 안정화를 위한 군사작전과 외교정책이 실패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라크 안정화를 도울 용의가 있는 세계 각국의 참여가 가능하도록 비전과 구도를 제시해야 한다.
우리도 미국과 파병군 성격이나 규모 따위를 놓고 저급한 신경전을 벌일 것이 아니라 우리 군이 이라크 안정을 위해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교·군사적 여건을 만들어 달라고 미국에 당당히 요구하는 적극 외교를 펼쳐야 한다.
이 계 성 국제부장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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