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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정진홍 교수의 본받고 싶은 사람―장 병 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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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정진홍 교수의 본받고 싶은 사람―장 병 길 교수

입력
2003.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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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정진홍(66·한림대 한림과학원) 교수. 사람 좋은 인상에 웃음이 많다. 언제나 반듯하면서도 겸손한 모습에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은 다 저럴까 싶다. 하지만 그의 젊은 날은 고민과 갈등 뿐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아버지가 피랍되고 가족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꿈도 희망도 없이 보낸 중고 시절. 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 1956년 서울대 종교학과에 입학한 건 자유와 진리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그러나 대학은 그의 기대에 어긋났다. 목사 출신 교수 1명이 고작이라 종교는 곧 기독교를 뜻했다. 기독교냐 이단이냐의 이분법적 논리는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마치 질식할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 때 만난 사람이 장병길(84) 전 서울대 교수. 정진홍 교수의 평생 스승이 된 사람이다. 정 교수는 그에게 학자와 선생의 길을 모두 배웠다.

장병길 교수는 1957년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강사로 '원시종교이론'이라는 과목을 맡았다. 계시, 섭리, 은총 같은 말만 듣던 정 교수에게 상징, 신화, 제의 같은 낯선 개념어들은 신선하기만 했다. 다양한 종교를 분석, 비교하는 장 교수의 강의를 듣고 비로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가 된 것도 언젠가 장 교수가 "너희가 나이 먹으면 한국 종교학계의 대표 학자가 돼야지"라고 한 말이 계기가 되었다. "그 때까지 아무도 나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어요. 갑자기 할 일이 쏟아지는 느낌이었죠."

장병길 교수는 이듬해 서울대 종교학과의 전임 교수가 되었고 정 교수는 졸업 후 군에 다녀와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4년 내내 가정교사를 해야 했던 대학 시절의 고단함은 대학원생이 되었다고 나아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배가 고프면 호떡을 사먹었다. 어느날 장 교수가 불러 "내 방에서 지내라"고 했다. 그 날로 정 교수는 장 교수 방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에는 조교로 발령이 났다.

가까이서 본 장 교수는 "자기 자신의 물음을 물었던 정직한 학자"였다. 갓 부임해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선임 교수와 사사건건 부딪혔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온 학교에 유명했고 정 교수가 중간에서 쩔쩔 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이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제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스승을 생각하면 언제나 "나는 나에게 얼마나 정직한가?"를 자문한다.

장 교수에게 본받고 싶은 것은 학문 뿐만이 아니다. 원고료가 넉넉치 않던 시절, 장 교수는 정 교수에게 신문사 등에 원고료 심부름을 보내곤 했다. 돈을 받아 오면 3분의 2정도는 가난한 고학생인 정 교수에게 봉투째 주었다. 언젠가 고마운 마음에 계란 한 줄을 사 들고 갔더니 "이 나쁜 놈. 어머니한테 그렇게 해라"라며 호통을 쳤다. 졸업한 지 20년 만에 모교에 부임해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장 교수의 첫 마디도 "학생들한테 잘해라"였다. 정 교수는 제자가 늘어나면서 "나는 제자들에게 장 선생님처럼 하고 있나" 돌아보곤 한다.

정진홍 교수는 올 2월 서울대에서 정년 퇴직하면서 장병길 교수를 모셨다.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 동갑내기인 황필호 강남대 교수, 이은봉 덕성여대 교수와 함께 은퇴식을 하면서 장 교수의 논집 '한국종교와 종교학' 출판기념회를 같이 했다. 장 교수는 그 날 제자들에게 "한국의 종교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초의 문제의식에서 한 걸음도 비켜나지 않은 셈이다. "저 연세에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싶었다"는 정진홍 교수. 이제는 "종교학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지만 종교학을 하는 사람은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던 스승의 말이 가장 오래 가슴에 남아 있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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