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한 강연회에서 지방부터 단계적으로 중고교 입시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교 평준화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이미 익숙한 것이라 새로울 게 없지만, 정 총장의 주장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고교 평준화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고착화하고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정 총장은 그 주장의 근거로 "서울대생의 40%가 서울 출신이고, 특히 경제, 경영, 법학 등 인기과의 경우는 60%가 서울 출신"인 동시에 "그것도 서초구, 송파구, 강남구 등 강남권 3개 구 출신으로 집중돼 가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신선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간 대체적으로 보아 '불평등'의 문제는 고교 평준화 찬성론자들의 논거였는데, 정 총장은 흥미롭게도 고교 평준화 폐지론자의 입장에서 그 논거를 전유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 총장이 불평등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러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정 총장은 서울대 차원의 문제를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착각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정 총장의 주장대로 지방부터 고교 평준화를 폐지하면 서울대엔 지방 명문고 출신들이 많이 입학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서울대가 '부유층의 대학'으로 변질돼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세간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 전체론 무엇이 달라질까? 물론 좋은 점이 있다. 서울대는 국가적 자산이므로 서울대의 이미지가 좋아지는 것도 국익이다. 또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과 수재들끼리만 모여서 공부하는 데 따른 효율성도 사회적 이익일 것이다.
그런 이익들을 모두 합쳐 20이라고 하자. 손실은 얼마나 될까? 내가 보기엔 80이다. 정 총장은 솔직하게 서울대 입학이 계층 이동의 중요한 수단임을 인정했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서울대 입학을 위한 경쟁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처절한 '계급 전쟁'이다.
고교 평준화 폐지는 최일선에서만 벌어지던 전쟁을 전 국토로 확장 시키고 징집 연령을 크게 낮추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물론 이 확장된 전쟁에서도 무기(돈)가 많은 쪽이 유리하다. 무기가 약한 쪽의 부모는 자신들의 삶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군자금 확보에 열을 올릴 것이다. 그로 인해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한국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이게 바로 80의 손실이다.
나는 고교 평준화 폐지론자들이 차라리 솔직하게 사회진화론을 들고 나오면 좋겠다. 국가들 사이의 치열한 전쟁에서 한국의 승리를 위해선 좀 잔인하더라도 처절한 적자생존(適者生存) 원리가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논쟁이 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불평등은 좋지 않다는 식의 논지로 고교 평준화 폐지를 주장하니 당혹스럽다.
정 총장은 기존 '계급전쟁'의 불합리성은 전혀 의문시하지 않았다. 10대 후반에 한번 치르는 전쟁으로 평생이 결정되는 기존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 전쟁의 과부하를 평생에 걸쳐 분산시켜 합리적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염려한 건 나라가 아니라 서울대였다. 정 총장이 나라를 생각하는 좀더 큰 야심을 가져주길 기대한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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