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29일은 꼬박 술을 마시고 10 편 넘게 공연을 본다. 일주일에 한 번은 모교인 연세대에서 '20세기 한국 연극 바라보기' 강좌를 맡아 3시간 내내 쉬지 않고 강의를 하고, 하루에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책상에 앉아 희곡을 쓴다. 새로 발표한 작품을 포함, 두 개의 작품이 공연되고 있거나 공연될 예정이고 내년에 발표할 작품도 이미 두 편을 탈고한 상태다.언뜻 듣기에 젊은 극작가 이야기인 듯하다. 그러나 올해로 팔순을 맞은 연극계 원로 차범석 예술원 회장의 요즘 일상이다. 차범석씨는 한국 전후문학의 1세대로 '해방 이후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는 '산불'을 비롯, 지난 50년 간 수 많은 희곡을 써 왔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가 가작에 입선돼 등단한 이래 극작가, 또 연출가로서 단 한번도 연극 현장에서 떠나 본 적이 없는 그의 삶을 살피노라면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 카피조차 구차하게 느껴진다.
그의 여덟 번째 희곡집 '옥단어!'(푸른사상 刊)의 출판 기념회가 13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다. 그의 팔순을 기념하는 행사는 출판기념회 말고도 다양하다. 9월18일부터 10월12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아리랑에서는 그의 대표작 '산불'이 공연됐다. 12월12∼20일 이윤택의 연희단거리패는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그의 신작 '옥단어!'를 팔순 기념공연으로 올릴 예정이다.
그러나 정작 팔순을 맞는 그의 소감은 담담했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내 자신을 구속하면서 살지 않았고 또 누구를 속박하지도 않고 연극과 함께 평생을 자유롭게 살았으니까요." 팔순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카랑카랑한 목소리, 탄력을 잃지 않은 피부, 꼿꼿한 걸음걸이. 그 모든 게 지금도 노래방에서 스스럼없이 마이크를 잡고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부르는 자유인 기질 덕분인 듯했다. "전 자동차도 없고 휴대폰이나 신용카드도 안 써요. 편리함에 길들여지다 보면 자꾸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지요." 일부러 몸을 괴롭히기 싫어서 운동이나 산책은 일절 하지 않는다는 그의 또 한 가지 건강 비결은 바로 무욕(無欲)이다.
그런 건강이 뒷받침했기에 여든이라는 나이에도 새로 희곡집을 선보일 수 있었다. 이번에 낸 희곡집 '옥단어!'에는 올해 새로 발표한 작품 '옥단어'를 비롯, 작가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그린 '공상도시',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는 뮤지컬 '처용', 제주 여성이 지니는 강인한 정신력과 도덕성을 다룬 오페라 '백록담'이 함께 실렸다. 신작인 '옥단어'는 목포 사람들이 옥단이를 부르는 말에서 따온 제목이다. '옥단어'는 나이 오십만 넘은 목포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하는 목포의 명물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남의 집 일을 도와주며 살았던 못생기고 우스꽝스러운 실존 인물이었다. "옥단이는 무언가 모자라는 인물이지만 사람들을 사랑했고 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죠. 휴머니즘이 점점 퇴색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꼭 한번 되새겨 보고 싶은 존재였어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를 연극 현장을 묶어 두는 힘이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더욱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빚어내는 마술 같은 사건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게 연극"이라며 "그래서 연극에 매료됐고 지금도 연극이란 말이 내 가슴을 뛰게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동백림 사건'을 다룬 '악어새'를 비롯해 앞으로 발표할 작품에 대한 구상을 털어놓았다. 그는 앞으로도 써야 할 희곡이 여전히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 '연극인'이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