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노루 한 마리가 딴 동네 노루 열 마리 맞재비(맞잡이)라 캤어요. 조상들이 없는 말 했겄십니꺼?" 노루 고기를 약(藥)으로 쓰던 시절 이야기지만 주민들에게는 지금도, 함양 산물(産物)의 약효에 관한 한, 1대10의 등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어서 '개똥도 약에 쓰려면 함양 땅에서 주워 써야 좋다'는 믿음으로 구전(口傳)되고 있었다.'약발 좋은 두메마을' 경남 함양군이 약초로 떨쳐 일어서겠다는 것은 그 같은 고집과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쪽 사람들은 백두대간의 기점을 지리산으로 친다. 거기서 발원한 산맥이 덕유 속리 태백 오대 설악으로 줄달음쳐 금강 백두에 이르러 장하게 맺었다는 것이다. 뻗어올라 넘고 맺는 대간의 힘이 모인 곳이 지리산이라는 말인데, 그 주봉 천왕봉을 아랫마을 산청과 함께 나눠 품은 고장이 함양이다. 그 정기가 산이고 들에 넘쳐 함양에서 나고 자란 곡식이며 풀이 예사 것들과 다르다는 것인데…. '설마…'하며 듣다가도 금새 세뇌가 되는 것은 무식한 기자만은 아닌 것이 인근 경상대며 진주산업대며 마산대 등 전문 연구진이 함양의 토질과 전통약제 시험 연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방면에서 이름이 알려진 한국토종약초연구소 최진규 소장이 괘관산 기슭으로 주소를 옮긴 것도, 10여년 전부터 경남농업기술원 약초시험장이 함양 땅에 터를 잡은 것도 비슷한 연유일 것이다. 군 면적의 77%가 산지인 탓에 예부터 약초며 산채가 풍부할 수밖에 없었고, 토질이 배수성 좋은 부엽토인 데다, 백두대간을 남서로 둘러 볕이 길고 좋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지리·지질학적 배경이다.
"9,000여 농가 가운데 약초 상업농 축에 드는 집이 500여 가구는 되고, 텃밭에 두릅이며 작약 당귀를 심은 집까지 치자면 한정이 없을 낍니더." 워낙 전통이 오래되고, 관습적으로 약초를 심는 집이 많아 현황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게 군 농업기술센터 관계자의 설명. 함양(咸陽)을 우리 말로 풀어 쓰면 '다볕'이고, 옛 지명 천령(天嶺)은 터가 높아 하늘에 닿는다는 의미일 터이니, 저절로 나고 자라는 약초에게는 물론이고 재배를 하는 데도 천혜의 조건이겠다.
"식솔 모두가 무병장수하는 집이 있어 이유를 캐봤더니 그 집 도마가 구지뽕나무 도마였던기라." 항암 당뇨에 효험이 있다는 구지뽕 성분이 칼질을 하면서 음식 재료에 섞여 병이 들 틈이 없었던 것이라는 말. 어떤 동네 사람들은 술이 전통적으로 센데 그건 마을 샘으로 헛개나무(숙취해소 효능) 뿌리가 뻗어 든 까닭이라고도 했다. 대대로 약초와 친하다 보니 주민들이 조약(調藥)에도 밝아 개화한 뒤로도 한동안 서양 병원이 터를 못 잡았다는 우스개 소리가 아직 들리는 곳도 함양인데, 올 초부터 군이 약초·산채 산업화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도 그 같은 배경에서다. "애탕가탕(애면글면) 논 갈아놔 봐야 나락을 사주니 안 사주니 캐륟는데, 이 참에 가장 함양적인 걸로 한번 덤벼보자는 기지요."
군은 병곡면 원산리 임야 100만평을 털어 약초를 심는 것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군 전역에 500만 평의 전국 최대규모 산약초 단지를 조성할 참이다. 대한한의사협회와 제휴, 협회가 추천하는 오갈피 등 30여 품목을 단지화해 서하에는 산초, 백전에는 하고초 등 작목을 특화한다는 구상. 임금님 쓰던 옻은 약이며 칠이며 모두 '마천 옻'이었다는 그 명성과 자부를 살려 마천면에는 옻나무 10만주를 추가 식재하는 등 252개 법정마을마다 1㏊ 이상의 특화 약초단지를 꾸민다는 계획이다.
거기에 장뇌산삼도 포함된다. 연전 한 바이오 벤처업체가 함양 토질과 지형에 반해 먼저 청해오기를, 산삼을 심고 관리해주는 조건으로 묘삼 1,000만 포기를 제공하고, 판매수익금의 30%를 군에 넘기겠다는 것. 군은 육십령 너머 남덕유산 어깨자리에 맺은 깃대봉 600∼900고지 군유지 등 100만평을 할애해 지난 달 초부터 올해 식재분 250만 포기 묘삼 식재를 시작했다. 11개 읍·면 별로 두락을 정하고 산삼 작목반을 꾸렸다. 행여나 손을 탈 지도 모를 일이고, 멧돼지와 두더지 횡포도 염두에 둬야겠기에 군은 삼밭 둘레에 전기철책과 땅 속 전기충격선을 두르고, 멀찍이 무인카메라도 설치할 참이다.
이 달 초에는 남들 다 하는 '축제'도 처음 열었다. 연암 박지원이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시설했다는 유래에서 빌어 축제 이름은 '물레방아 축제'다. 갖가지 산물과 청정한 자연을 알리자는 취지였다. 함양 땅에서 나는 갖가지 약초며 산채를 전시하고, 근동의 심마니 약초마니들을 초빙해 구수한 입담도 선뵀다. 군은 지난 봄 누렁호박 모종 4만 여 본을 각 마을과 공무원들에게 나눠주고 가꾸게 한 뒤 축제 기간에 맞춰 수확, 참가객은 물론이고 고속도로 휴게소 과객들에게도 한 덩이씩 무료로 나눠줬다. 내년에는 맷돌호박을 준비할 참이라고 했다. "사업하는 사람들도 찾아와서 약초 드링크며 음식으로 공장을 해보겠다고 청하더라구요. 좋은 일이지예."
이 같은 시도에 대한 주민들의 동조를 뒷배로 군을 전국 최고의 약초산업 허브로 가꾸겠다는 게 함양군의 장기 구상. 군은 도 농업기술원 및 인근 대학들과 지리산 자원 산업화단지 조성을 위한 협약을 맺고, 한약재 품종개량과 약성 연구, 가공, 상품화 사업에 착수했다. 약초 테마공원과 상설 전시장을 꾸미고, 한약상 한의원 등을 두고, 한방 찜질방과 사우나·숙박시설, 한약재를 활용한 전문 음식점을 유치해 군 전체를 한방 타운화 하자는 계획도 세웠다. 장뇌삼 수확철에 맞춰 산삼캐기를 체험행사로 꾸며보는 구상도 구체화하고 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자고 사람을 보냈던 삼신산 가운데 하나가 지리산 아니던가. 그 명산을 타고 앉은 함양이 불로촌(不老村)의 꿈을 익히고 있다.
/함양= 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정성도(54·사진)씨가 약초꾼 선친을 따라 산 자락을 타기 시작한 게 14살 때 부터다. 하지만 그의 약초마니 경력은 30년이라고 했다. "약초와 얼굴을 익혀 밥값이라도 하자면 적어도 10년은 걸리기 때문"이다.
"한창때는 하루 산 타면 80근(50㎏)은 너끈하게 지고 왔는데 지금은 잘해야 30∼40근입니더." 산이 우거지니 약초도 묻히고 덜 나더라는 것이다. 30년 전만해도 산삼과도 안 바꿨다는 지초도 군락으로 흐드러졌는데, 이제는 구경하기도 어렵게 됐다. "지초 그기 장복하면 마누라가 셋도 모자란다는 거 아이요. 인자는 없어요."
그는 약초도 채취하는 시기에 따라 약효가 다르다는 것도 안다. 봄에 천마 줄기를 보면, 오그랑망태 못 채우는 한이 있어도, 그 자리에 자기만 아는 표식을 해두고 산을 내려선다. 줄기가 시들어 땅속 뿌리만 남는 가을 녘에 캐기 위해서다. 그는 산마도 가을에 봐뒀다가 겨울에 캔다. "가을 천마, 겨울 산마 아입니꺼. 조랭이 채우는 게 다가 아잉기라예." 그는 제 자랑처럼 들릴까 저어하듯 "그건 약초꾼 상식"이라며 순되고 숫접게 웃었다.
그렇게 걷어 온 하루치 약초를 말리고 손질해 내다 팔면 5만원도 받고 10만원도 받는다. 그나마 값 싼 중국산 한약재가 넘쳐 나 주인을 잘 만나야 대접을 받는다. 소아마비를 앓은 그는 다리를 전다. 나이가 들면서 산 타는 일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아들(22)이 약초 일을 마다해도 서운할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다고 했다.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산이 있으니 약초는 날 것이지만, 그렇게 넘쳐나던 지리산 약초꾼의 시대는 그의 대에서 끊어질 것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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