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가는 가을에 산사에 가본 적이 있으신가. 단풍나무 사이로 햇빛이 잘게 부서져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산화한다. 더욱이 찰라 같은 만추양광(晩秋陽光)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나이여서인지, 조락의 아쉬움이 각별하다. 사찰을 뒤로 하고 한용운의 시처럼 '단풍나무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암자로 향한다. 사방은 고요하고 낙엽 밟는 소리만이 나와 동행한다. 천지간에 나 홀로 길을 가는 '절대적 자아'에 빠지는 황홀함을 느낀다.이 '절대적 자아'란 무엇인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나 홀로 우뚝 선 자아인가. 모든 존재에 상대적으로 우선하는 자아인가. 아니다. 우주 만물의 모든 존재들과 조화로운 자아이며 모든 생명들과 더불어 의미를 갖는 자아이다. 나아가 존재의 가치마저 무(無)이며 공(空)인 자아이다. 그러므로 나를 내세울 것이 없으니 욕심도 집착도 없다.
나는 이래서 불교를 좋아한다. 그러나 어느 사찰 한 곳에도 호적이 없으니, 종교로서가 아니라 사상으로서 불교를 좋아하는 셈이다. 좀 넓게 말하면 불교로 인해 형성된 아이덴티티를 좋아하는 것이다. 유일신이라는 권력적 속성도 없고 이타적이며,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로운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는 불교의 생각이 좋은 것이다.
책장이로서 꼭 좋은 불교 입문서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붓다의 깨달음'을 읽고 머뭇거리게 되었다. '살아 있는 인류의 지혜' 시리즈의 한 권인 이 책은 불교 입문의 단 한 권의 교양서로 충분히 값한다. 알게 모르게 불교적 사고에 오래 젖어 살았음에도, 우리는 불교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인도불교와 한국불교가 어떻게 다른지, 원시불교(근본불교)가 무엇인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도 명확하지 않다. 왜 사찰의 형태나 수행법이 다른지, 동아시아 삼국에 왜 선불교가 발달했는지도 궁금하다. 또한 왜 서구에서 갑자기 불교가 유행했는지도 알고 싶다. 그 모든 것이 이 책에 실려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미덕은 풍부한 도판과 역주이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도판 사용료가 터무니없는 경우가 간혹 있어서, 출판인들을 고달프게 한다. 이 책에는 불교 사진집으로 생각해도 좋을 만큼의 훌륭한 사진들이 가득하다. 또한 대략 원고지 천 장 분량의 꼼꼼한 역주에는 번역자와 출판사의 노력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호기심에 몇 개의 역주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았지만, 개론서로서 충분한 퀄리티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역주가 꼼꼼한 책이 좋은 책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한성봉·동아시아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