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네틀, 수잔 로메인 지음·김정화 옮김 이제이북스 발행·1만8,000원
'사이언스'나 '네이처'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잡지에 '언어 사멸'에 관한 연구 논문이 심심찮게 실린다. 최근에도 영국의 한 인구생물학자는 전세계에서 현재 통용되고 있는 언어 중 6,000개 이상이 사용자 감소로 소멸 위기를 맞았다고 지적했다. "지난 500년 동안 지구에서는 4.5%의 언어가 소멸했다. 그 동안 소멸한 조류는 1.9%, 사라진 포유류는 1.9%이다."
만약 타이압어(파푸아 뉴기니 가푼 마을 주민 100여 명이 사용하는 언어)가 희귀 조류이고 우비크어(흑해 소치 주민 언어)가 죽어가는 산호라면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곤경을 걱정할 것이다. 우리가 캘리포니아 콘도르의 멸종에 대해 우려하는 것보다 타이압어가 사라지는 것을 덜 염려해도 되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7,000개에 가까운 현존 언어의 상당수가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지, 몇몇 거대 언어군으로 언어가 흡수 통합되고 있는 상황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약육강식으로 소수 언어가 소멸되는 것을 섭리로 여기는 것이 왜 잘못인지를 언어학과 인류학 등의 지식을 통해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언어는 어떻게 죽어가는가
언어학자들은 최대 6,700개 정도로 추정되는 언어의 절반 이상이 21세기에 사멸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세계 인구의 90%가 사용하는 언어는 100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는 어떻게 사라졌으며 또 죽어가는가? 1932년 엘살바도르 농민 봉기 이후 단지 인디언이라는 이유로 2만5,000명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디언이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언어를 포기해야 했다. 러시아가 1860년대 카프카즈 북부 무슬림을 정복하면서 우비크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우비크어도 사멸 위기에 처했다. 체첸어나 현재 거의 1,000만 명이 쓰고 있는 쿠르드어의 운명도 어쩌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 태국전력공사는 수력 발전용 댐을 콰에노이강의 두 지류에 세웠고 이 때문에 우공족의 두 마을이 침수됐다.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우공어도 다른 언어 속으로 침몰했다. 베네수엘라 쿨루에네강 하류 지역에서 쓰이던 트루마이어 사용자들은 1962년에 창궐한 독감으로 사용자가 10명 미만으로 줄었다.
외부 요인만이 언어 소멸의 이유는 아니다. 농업이나 산업혁명 등 경제적 문제는 포괄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준다. 영국의 켈트어를 비롯해 웨일스어, 콘월어, 맹크스어 등은 영어에 묻혀 서서히 잊혀져 갔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은 현지어 말살 정책, 서구 선진문화를 동경한 현지 엘리트 계층과 주민들의 욕구 등에 힘입어 현지어를 사멸시켰다.
언어만 잃는 것인가
'바벨탑의 저주'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이런 언어 소멸 추세에 대해 별 문제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언어 자체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면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대체되는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고, 나아가 언어 수가 줄면 그만큼 의사소통이 쉬워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언어 다양성은 문화적 다양성의 척도이며 한 언어가 사멸하면 그 생활양식도 사라진다는 점에서 언어의 소멸은 문화 소멸의 징후"라고 본다. 해양 생물학자인 요하네스는 1894년에 태어난 서태평양 팔라우 어부를 인터뷰했는데 이 어부는 300개 이상의 서로 다른 어종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 전세계 과학 문헌에 올라 있는 어종 자료의 몇 곱절이나 되는 어종의 음력 산란 주기를 알고 있었다. 이런 지식 중 상당 부분이 수천 년 동안 이들의 언어로 구전돼 왔지만 오늘날 팔라우의 젊은이들은 토종 어류 대부분을 식별하지 못한다.
언어와 생물다양성의 상실
공교롭게도 대표적으로 다양한 언어가 포진한 지역인 아프리카 적도 인근 지역, 인도 남부와 동남아, 태평양 등 열대지역 언어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의 생물다양성이 감소하는 현상과 일치하고 있다. 자연 파괴와 원주민 이주는 생물 종의 감소와 언어 소멸을 함께 부른 것이다. 이 책은 "과학 발전의 위대한 다음 단계들이 오지의 삼림 속에 있는 어느 이름 없는 언어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지적도 덧붙였다. 그리고 풍요로운 나라란 언어의 다양성을 부인하고 말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포용하는 국가라고 주장한다.
1989년 타계한 마오리족의 지도자 제임스 히네어는 "마오리 언어는 마오리 문화와 마나(힘)를 창조하는 생명력이다. 마오리어가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그러면 나는 우리 부족 사람들에게 우리가 누구냐고 묻겠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유명한 하이데거의 말이 안타까움을 섞은 마오리족 지도자의 웅변과 교차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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