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1월8일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 무장돌격대원 600여 명이 뮌헨의 한 맥주홀을 습격하며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흔히 뮌헨 반란 또는 비어홀 폭동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뮌헨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지방은 반동 우익 분자들의 소굴이었다. 히틀러는 그 전해 무솔리니가 '로마 진격'을 통해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체제를 수립한 데 크게 고무돼 있었고, 독일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뒤집어 엎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당시 바이에른 지배 계급과 히틀러의 이해관계가 온전히 겹쳤던 것은 아니다. 바이에른 지배층은 옛 왕실의 부활을 통해 베를린 정부로부터 분리·독립하기를 원했고, 히틀러는 극우 군사 단체들과 협력해 베를린으로 쳐들어간 뒤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육군 장관 한스 폰 제크트가 바이에른의 분리주의를 탄압했기 때문에 이 두 세력 사이에 한시적 연대의 여지가 있기는 했다.
히틀러는 맥주홀에서 집회를 열고 있던 바이에른 지도자들을 권총으로 협박하며 반란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에리히 루덴도르프도 현장에 나타나 히틀러에게 협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반란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바이에른의 옛 왕실과 가톨릭 교회 세력 일부가 이에 반대하면서 히틀러는 고립되었고, 반란은 이틀 만에 불발로 끝났다. 히틀러는 11월11일 체포됐지만, 재판 과정에서 민족주의 언론의 호감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법정 최저형인 징역 5년을 선고 받았고, 이듬해 성탄절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한 해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감옥에서 나치즘의 바이블이 될 '나의 투쟁'을 썼다. 비어홀 폭동의 실패를 계기로 히틀러는 쿠데타 전술을 포기하고 의회주의로 돌아섰고, 그 뒤 10년이 안 되어 합법적으로 독일을 접수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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