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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자 릴레이 인터뷰] <4> 천 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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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자 릴레이 인터뷰] <4> 천 운 영

입력
2003.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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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게 뒷맛은 입 안에 쌉싸래하게 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향긋한 단맛이 남는다. 무언가 다른 맛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천운영(33)씨는 그 뒷맛의 욕구가 솟아나는 삶의 의욕과 닮았다고 말했다.계간 '파라21' 2003년 가을호에 발표한 단편 '멍게 뒷맛'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무엇으로 활력을 얻는가, 질문을 던져봤다. 불행을 겪는 지인들을 위로하면서도 묘하게 흥분했던 적은 없는지, 돌아서서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데 안도한 적은 없는지. 그럴 때 이상하게도 잘 살아야겠다는 힘이 나지 않았는지."

몇 달 전 그가 사는 아파트 옆집으로 이사 온 부부는 많이 싸웠다. 고함을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난리통에 밤새 숨을 죽이곤 했다. 다음날 만난 부부는 사이 좋게 팔짱을 낀 다정한 모습이었다. 소란에 익숙해진 뒤에는 오늘 밤은 안 싸우나, 은근히 기대하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는 이사 갔지만 작가의 마음의 뒷맛은 오래 남았다. "삶은 너무나 자주, 이해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게 뒷맛'에서 폐백용 꽃을 만드는 화자도 아름다운 이웃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 건조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행복할 줄밖에 모르는 것 같은 여자의 환한 얼굴을 지독하게 시기하다가 어느날 그 여자가 남편에게 학대 받는다는 걸 알게 됐다. 신음소리, 울음소리, 어항 부딪히는 소리가 난 뒤에 여자는 멍게 상자를 들고 화자를 찾아왔다. 불행한 여자가 다듬어주는 멍게 뒷맛은 싸하고 향기로웠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싸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여자의 입에서는 멍게 향이 감돌았다. 침이 솟았다. 생활의 힘이 그렇게 얻어졌다. 싸운 날 밤늦게 찾아온 여자가 문을 두드렸고 화자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쫓아온 남편을 피하다가 아파트에서 떨어졌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날부터 화자는 생기를 잃어갔다. 더 이상 무슨 일도 할 수 없었다. 멍게를 사와서 입에 넣어도 역한 맛 뿐이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의 울음소리가 주던 떨림이, 그 활력이 이제는 생겨나지 않았다.' 삶의 활기를 주었던 '당신'의 불행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자가 기억하는 멍게 뒷맛이란 우리 모두가 은밀하게 알고 있는 맛이 아닌가.

심사위원들은 '멍게 뒷맛'이 사물에 대한 장악력이 매우 뛰어난 작가의 특기가 매우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천운영씨는 "첫 창작집 '바늘'을 낸 뒤 더욱 강렬한 글쓰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부담에 시달렸던 게 사실이다. 이제는 조금씩 여유로워진다. 사물·사람 간의 관계, 세계 전체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경험 뿐만 아니라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올 3월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많이 읽고 많이 배우면서 글쓰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느라 단편 하나를 짓는데 한 달 꼬박 걸렸던 것이, 지난달에는 작품을 쓰기 시작한 지 나흘 만에 마쳤다.

"이제는 내가 문장을 만들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변화다. 앞으로 더 많이 집중해서 이야기를 끌어내고, 삶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통찰하는 힘을 갖기를 소망한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 약 력

1970년 서울 출생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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