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가을 고구마 수매를 둘러싼 전남 함평군 농민들의 피해보상 투쟁은 현대적 농민운동의 출발이다. '함평 고구마 사건'은 지역 농민들의 단순한 피해보상 투쟁으로 시작됐으나 가톨릭농민회(가농) 등의 적극적인 참여로 기도회와 시위, 단식농성을 통해 전국적 이슈로 사회문제화 했다. 이 사건은 79년 경북 안동지역의 감자 투쟁(일명 오원춘 사건)과 함께 70년대 농민운동의 효시로 자리했다. 해방 후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은 전국적으로 330여만명의 조합원을 갖고 반제·반봉건·민주변혁을 추구했으나 단독정부 수립과 농지개혁,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와해됐다. 5·16 쿠데타 이후 저임금·저곡가를 기반으로 독점재벌 고도성장 정책을 추진, 오랫동안 농민의 침묵이 강요되고 있었다.76년 9월 전남도 농협은 그 동안 건(乾)고구마(얇게 썰어 말린 것) 형태로 수매하던 것을 이번부터 생(生)고구마 상태로 수매한다고 발표했다. 시가 1,000원(가마 당) 정도 하는 생고구마를 1,300∼1,400원 수준의 건고구마 값에 전량 수매한다는 것은 농민들에게는 복음이었다. 농협 직원들은 고구마 농가를 찾아가 농협이 자체 제작한 PD포대까지 나눠 주었다. 그러나 생고구마 수매는 40% 정도 밖에 이뤄지지 않았고, 나머지 고구마는 포대 채로 썩거나 홍수 출하로 덤핑 처리됐다. 당시 생고구마 57가마를 수확했으나 반 이상을 썩혀버리고 피해보상 대책위원회를 이끌었던 서경원(徐敬元·66·현 범민족울타리운동본부 대표)씨의 회고. "농협은 이런저런 핑계만 대고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액을 조사했다. 4개 면 1개 읍 9개 마을 160농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총 309만원(호당 18,000∼19,000원)의 손해가 확인됐다. 함평군 전체의 피해는 1억4,000여만원으로 추산됐다. 나중에 단식농성 기간 협상 과정에서 당시 전남도지사는 '수매자금 가운데 1억6,000만원이 유용됐다'고 고백했다. 결국 중앙에서 내려온 수매자금을 공무원들이 유용하고 그 손실을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덮어 씌운 것이었다."
대책위는 77년 4월 22일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가진 기도회를 시작으로 서울과 대전 부산 등 대도시와 농촌을 돌아다니며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했다. 이듬해 4월 24일 광주 북동 성당에서 60여명이 모여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당국은 비로소 대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농성 9일째인 5월 2일 대책위가 최초에 조사했던 피해액 309만원을 보상했다. 당시 가농 전남지부 조사담당으로 농성에 참가했던 조계선(趙啓善·53·자영업)씨의 설명. "현금으로 309만원을 만들어 주면서 농협측은 '돈의 출처는 묻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의심은 했지만 받았다. 어쨌든 농민이 정부를 상대로, 이른바 민(民)이 관(官)에게 이긴 최초의 사건이었다. 희망과 활기를 찾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가농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 연이은 농민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단식농성이 마무리 되자 감사원은 국세청과 함께 농협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농협이 고구마 수매자금 415억원 중 80억원을 부정 유출시켰다는 것을 밝혀냈고 이와 관련된 농협 도지부장 1명, 군조합장 62명, 단위조합장 139명 등 658명을 해임·징계했다.
함평 고구마 사건에 이어 이듬해 경북 안동에서 감자 사건이 터진다. 정부와 농협으로부터 받은 감자 씨앗을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않았다. 썩거나 말라버린 씨앗을 농민에게 나눠준 것으로 드러났다.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나섰고, 여기에 앞장섰던 당시 영양군 청기면 가농 분회장 오원춘씨가 납치·감금(5.5∼5.21)되어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가톨릭 안동교구 사제단에 알려졌고, 결국 오씨의 양심선언으로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후 안동 교구청에 사복 경찰이 난입해 신부와 가농 지도부를 강제 연행했다. 8월 6일 안동 목성동 성당에서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주례하는 특별 기도회가 열렸다. 구속자 석방과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28일간 농성에 들어갔다. 8월 2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안동 사태 관련 기도회가 열려 전국적인 사건으로 확대됐다.
함평 고구마 사건에 이은 안동 감자 사건은 농민운동이 단순한 '생존권 차원의 피해보상 투쟁'에서 벗어나 '정책 투쟁'과 '정치 투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정책 투쟁'은 81년 충북 음성군 부당농지세 시정 투쟁(2,000여명 대중집회, 84년 농지세법 개정의 계기)을 시작으로 82년 농협 민주화 100만인 서명운동(조합장 선거 관련)을 거쳐 85년 소몰이 투쟁(소값 투쟁)으로 이어졌다. 미국 소 과잉 수입으로 인한 소값 폭락으로 7∼8월 전국 20여개 시·군에서 수만명의 농민이 참가, 소떼와 경운기 트랙터 등을 몰고 가두 시위를 벌였다. 구호는 '소값 보상, 농가부채 해소, 수입개방 저지'였다. 이후 86년 1월 22일 전남 강진 지역에서 일어난 '쇠똥물 투척 시위'에 이어 4월 19일 무안 지역에서의 시위는 그 명칭이 '수입개방 저지 및 미국예속 정권 타도 무안 농민 실천대회'였다. 최초의 '정치 투쟁'이었다. 87년 초 전국농민협의회(전농)가 결성됐다. 60여명의 9일간 단식투쟁이 10년만에 발아한 것이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피해보상대책委 이끈 서 경 원씨
고구마 가마니가 쌓여있는 곳을 지나는데 술이 익는 듯한 야릇한 냄새가 났다. 1976년 11월 초순이었다. 팽팽하던 가마니(PD포대)가 납작해져 주저앉고 있었다. 온도에 민감한 생고구마가 서리를 맞아 부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가농 창립 때(72년) 회원으로 가입, 당시 전남지부 총무를 맡으면서 함평군 대동면에서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협이 제공한 가마니에 넣어, 그들이 요구한 대로 찻길에 내 놓았는데도 그들은 일부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그대로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고구마가 부패할 기미를 보이자 상인들이 몰려와 헐값에 사겠다고 덤벼들었다. 아내가 급한 마음에 900원씩에 상인들과 계약을 한 것을 내가 쫓아가 계약을 취소하기도 했다. 함평군 대동면과 학교면 대부분이 그랬고, 인근 무안군 일부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농 동료 등 4명이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액을 조사했다. 피해 조사를 하러 다니자 농협 직원, 마을 이장·반장과 유지, 공화당 당원 등이 나서 "민(民)이 관(官)을 이기느냐. 산림계에서 땔나무 채취를 처벌하려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공갈과 협박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대책위 회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 직접 피해를 입은 320명의 농민이 손도장을 찍고 함께 투쟁하기로 다짐했다.
77년에 접어들자 함평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우리집에 들락거렸고, 곧 '대책위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 도장 찍은 사람들은 사상이 이상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자신을 대책위 명단에서 빼달라고 사정하는 농민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4월 22일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농민 등 500여명이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당시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와 조비오 신부 등 20여명의 사제단도 동참했다. 동일방직 원풍모방의 노동운동 대표들도 참석해 우리를 지지했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농민프로그램을 담당하던 이우재(李佑宰·현 열린우리당 의원)씨도 참석했다. 기도회가 끝난 뒤 우리들 중 일부가 농협으로 몰려 갔으나 기동경찰대의 곤봉 세례만 받았다. 그날 나는 광주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며칠 후 농협 도지부 판매과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수십명의 피해 농민들을 읍에서 제일 좋은 식당으로 초대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에 맥주까지 대접하며 그는 엄청난 제안을 했다. "300여 피해 농가 모두에게 장기저리 융자로 송아지 한마리씩 입식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가구 당 2만원도 안되는 보상금을 요구하고 있던 농민들에게 3년 거치 10년 상환으로 70만∼100만원짜리 송아지를 준다는 것은 돼지 꿈을 꾸어도 어려운 일이었다. 동요의 빛이 역력했다. 곧 의견을 모아 대답해 주겠다고 얼버무리고 자리를 파했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내분이 일었다. 대책위의 정신적 지주였던 가톨릭 지도사제단에서도 '고구마 대신 송아지'안에 찬성했다. 난감했다. 4·22 기도회에서 우리를 성원했던 이우재씨를 찾아갔다. 그는 "고구마로 싸우며 원칙을 지켜야 한다. 송아지로 변하면 정부의 술책에 말려들게 된다"며 함께 투쟁할 것을 약속했다.
78년 4월 24일 광주 북동 성당에서 농민을 위한 기도회를 마친 우리는 무기한 단식농성을 결의했다. 가농 회원들과 농민 등 60여명이 모였다. 문익환 목사와 문정현 신부, 소설가 황석영씨 등 많은 인사들이 우리의 농성에 동참했다. 경찰이 성당을 3, 4겹 포위한 가운데 며칠 후 협상이 시작됐다. 주교관 응집실에서 열린 회의에는 윤공희 대주교, 고건 전남도지사,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전남도 경찰국장, 농협 과장 등과 농민 대표 5명 등이 참석했다. 농협과 전남도측은 '피해액 309만원 중 우선 100만원을 5월말까지 지급하는 것을 고려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우리는 그냥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는데 윤공희 대주교가 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방으로 따라 갔더니 윤 대주교는 "자네들을 의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더 열심히 싸워라"고 말했다. 더 열심히 싸웠다. 농성 9일째인 5월 2일 피해보상금 309만원 전액을 받아내고 농성을 풀었다. "고구마가 승리했다. 농민이 이겼다"며 우리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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