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청담동 거리에서 정장 한벌에 수백만원을 호가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최고명품들만 찾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그저 '괜찮은 가격대'일뿐이니까. 오히려 정장 한벌이 20만원대라면 '농담하냐'는 핀잔을 듣기는 쉽다. 청담동 지역의 엄청난 매장임대료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 그러나 디자이너 김용국(48)씨는 '그게 왜 농담이냐 '고 오히려 되묻는 사람이다. "적어도 옷입는 데는 빈부차이가 없어야죠"라는 그는 청담동 요지에 자기 영문이름을 원용한 '키미쿡(KIMY COOK)'이라는 맞춤형 부티크를 차려놓고 치마정장 21만원, 바지정장 22만원, 코트 27만원의 균일가 판매를 계속해오고 있다. 개점한 지 꼭 1년. 평소의 지론을 실천하면서 큰 적자없이 운영해온 게 만족스럽다는 그는 "평생 옷 만드는 남자로 남고싶은 소망이 이제 틀을 잡은 셈"이라며 웃는다.키미쿡이 존재하는 이유
지난해 12월 오픈했지만 키미쿡은 멋쟁이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소문이 많이 난 부티크다.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즐겨 찾고 예비신부들의 예복수요도 많다. 정장만 만들고 한 디자인당 최다 15벌만 생산해 희소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다 고객이 디자인을 선택하면 10여곳 이상을 꼼꼼히 가봉해서 완전 맞춤복과 똑 같이 만들어준다. 그만큼 손길이 가고 고객과의 친밀도가 커지기 때문에 고객의 80% 이상이 다시 찾는다.
물론 대차대조표 상으로는 적자다. 다행히 빌딩이 본인 소유여서 임대료를 내지않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마이너스는 아니다. 처음 청담동에 매장을 열 때 차라리 비싸게 팔라는 주변사람들의 권유가 많았지만 아직 한번도 가격을 올리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옷 만들기로 돈 벌고 싶지않다! 먹고사는 것은 빌딩 임대료로 충분하다.
갤러리아백화점에서 제 발로 나온 미친남자
키미쿡은 사실 내력이 꽤 있는 부티크다. 1994년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과 수원점에 입점했을 정도로 디자인력을 평가받은 브랜드. 당시 한벌에 80만∼100만원까지 팔리는 고가의 인기브랜드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백화점측의 횡포에 가까운 엄청난 수수료 요구에 미련없이 나왔다. 당시 갤러리아의 바이어가 "(백화점 못들어와 안달인데) 제 발로 걸어나가는 브랜드는 당신이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나가요 언니들'이 돈 벌게 해줬다
갤러리아에서 나오고는 소위 '나가요 언니들' 즉, 직업여성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방문판매 옷 장사를 계속했다.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 탓일까, 직업여성들일수록 더 고급스럽고 지적인 옷을 찾는다. 김씨의 깔끔하고 세련된 정장이 인기를 끈 이유다. 당시는 키미쿡이란 브랜드는 쓰지않았고 키미쿡을 재오픈하면서 방문판매는 그만 뒀다.
어머니의 유산
60년대 당대 사교계 명사들과 명문가 자제들이 다녔던 명동의 송옥양장점 바로 앞집이 어머니가 하시던 스카이양장점이었다.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디자이너도 우리 집 재단사였다. 어린 시절은 어머니 양장점에서 옷과 바늘 만지며 놀던 기억이 전부다.
그 많던 색색의 사치스러운 천조각들, 여자들의 어깨와 허리위로 날렵하게 내달리던 줄자들, 황금빛 단추들… 할머니도 늘 식구 수대로 옷을 만들어 대느라 저고리 앞섶에서 바늘이 떨어질 날이 없었단다. 그러고 보면 옷만들기는 벌써 3대째의 가업. 지금 매장 아래윗층을 뛰어다니며 노는 세살짜리 개구장이 아들이 내 뒤를 잇는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명함에 적힌 명칭은 디자이너 아니라 모드 디렉터(Mode director)
감히 디자이너라고 말 못한다, 남들이 그렇게 불러주면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명함에도 모드 디렉터라고 적었다. 디자이너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며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창의적인 인간은 못된다. 다만 기존의 것에 약간의 변형을 거쳐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재주는 있다. 하나님은 내게 적당한 재주와 낙천적인 천성을 주신 것 같다.
옷입기에는 빈부격차가 없어야한다
가격이 싼 까닭에 원단이 형편없을 것이라거나 미끼상품만 싸게 팔고 바가지를 씌울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천만에다. 원단은 큰 수입회사나 제조회사에서 팔다남은 자투리를 구입한다. 질은 좋지만 내셔널브랜드에 팔고 남은 자투리라 가격이 저렴하다.
상품은 전부 균일가다. 마진은 거의 없지만 재고율도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유지가 된다.
돈 벌이도 안되는데 왜 만드느냐고? 좋은 옷을 싸게 팔고 싶다. 그런 옷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된 게 지난 1년간의 수확이다. 적어도 옷차림에서 빈부격차가 생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주위사람들이 '괴짜'라고 놀리지만 상관없다. 옷 만들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죽을 때 사람들이 나를 평생 옷을 만들다 간 사람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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