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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39> 홀트를 추억하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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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39> 홀트를 추억하며 ③

입력
2003.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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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교사건 뒤로 홀트는 나의 의견을 존중해 내 말이라면 100% 신임하게 됐다. 그러는 동안 홀트는 일산에 복지타운을 세우고 고아를 위한 숙소는 물론 장애아를 위한 치료·재활시설까지 갖췄다.일산으로 옮긴 뒤에도 나는 자원봉사를 계속했는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고아원의 전기시설을 담당하는 기술자가 계량기를 조작해 60만원씩 내는 한달 전기료를 절반으로 줄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를 찾아 어찌된 일인지 따져 물었더니 "절약을 위해 한 일인데 잘못됐나요"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나는 "홀트가 전기를 도둑질해서 사회에 봉사했다는 오명을 씌울 생각이냐"고 그를 나무란 뒤 홀트를 찾아갔다. 금시초문이라며 방법을 묻는 홀트에게 나는 "이런 일은 회개를 해야 하는데 그 동안 떼먹은 전기료를 갚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라고 답해줬다. 그는 당장 돈이 없다며 주저하더니 오래지 않아 한국전력에 돈을 갚았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돼 홀트가 급하게 나를 찾았다. 홀트는 나를 보자마자 '돈을 갚기 잘했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보일러를 담당하던 화부(火夫)가 홀트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고는 '전기도둑질한 것을 고발할 테다'며 협박하자 '할 테면 해 보라'고 면박을 줬다는 것이다. 홀트는 '만약 그 돈을 갚지 않았다면 망신당할 뻔했다'며 두고두고 즐거워했다.

한번은 보모 하나가 자꾸 도둑질을 한다며 다른 보모들이 들고 일어나자 내가 먼저 그 보모를 내보내자고 홀트에게 제안했다. 홀트는 "미스터 원이 한국 보모를 해고할 때도 다 있네요"라고 농담하며 내 말을 따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인 간호사들이 문제를 삼고 나왔다. '고아원에서 쫓겨난 보모들은 창녀로 전락할 게 뻔한데 왜 내보내느냐'며 이들이 반발하자 홀트는 '미스터 원이 결정한 일에 웬 간섭이냐, 너희들이 보따리를 싼대도 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며 내 편을 들어줬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형제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그런데도 홀트는 가끔씩 계산이 분명한 미국인의 본성을 보여줬다. 하루는 홀트가 부르더니 '일하는 대가를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신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을 할뿐입니다. 돕더라도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라며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런 식의 배려는 배척한다.

그러나 홀트는 사실 순진하고 천진한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홀트의 생일이던 어느날 복지원에서 만난 그는 주머니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아이들이 선물로 준 것입니다"라며 싱글벙글 웃어대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천사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맏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나를 가장 잘 따르는 자식을 하느님이 데려갔다"며 펑펑 울면서 슬퍼하는 '범부(凡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때는 오히려 부인 버서 홀트가 더 대범한 모습이었다. 내가 복지원을 찾아갔을 때 버서는 고아들 방을 돌며 건포도를 나눠주고 있었는데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버서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죠"라며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세상의 어떤 고난도 홀트를 무너뜨리지 못했지만 질병의 고통은 평생토록 그를 괴롭혔다. 그는 특히 혈액 순환계통에 문제가 심각해 심혈관확장제 같은 약을 항상 휴대하면서 복용해야 했다. 주변에서는 이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안정을 취하라고 여러 번 권유했지만 그는 언제나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며 듣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사람들은 죽는 것만 두려워하지 영원히 다시 사는 길이 있는 것은 모릅니다"고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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