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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재계, 구심점 필요한 때

입력
2003.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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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회장직 떠넘기기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SK비자금 사건으로 손길승 회장이 물러나자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에게 공이 넘어가는 듯 했으나 본인의 완강한 거부의사를 꺾지 못하고 있다.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전경련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손보기 대상으로 떠올랐다. 재계의 입을 대변하던 김석중 상무의 '인수위 목표=사회주의' 발언은, 당사자는 와전됐다고 강변했지만 손병두 부회장까지 동반퇴진하는 계기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회장직을 맡은 손길승씨도 한나라당과 대통령 측근공신에 전달한 거액의 불법 비자금과 관련하여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기업이 제공한 불법선거자금은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 틀림없다. 돈을 받은 쪽에서는 장부를 태워버렸다고 오리발을 내밀 수 있으나 비자금을 조성하여 제공한 기업측에서는 어물쩍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사과박스에 담긴 현금다발을 어떤 방법으로 조성하여 어느 예금계좌에 넣어두었다가 어떻게 전달했는지를 자백해야 하는데 후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비자금 조달방법으로 사용된 수입누락 또는 경비가공계상 수법을 밝혀야 하고 비자금계좌도 공개해야 한다. 일단 단서가 잡히면 연결계좌의 거래내역이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나올 것이고 SK글로벌 사태와 같은 대규모 분식회계가 새롭게 노출될 가능성도 열려있다. 불법자금에 대한 형사책임은 사면하더라도 시민단체의 주주대표소송을 막을 길은 없다. 이런 복잡한 국면이니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재계의 입장을 대변할 자원자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경련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재계의 힘을 모아 경제의 활로를 찾고 수출성장의 기조를 유지하려면 전경련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반기업 정서는 기업의 투자와 고용을 위축시키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청년실업 해결에 앞장서야 할 기업들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고 있고, 노조의 등살을 피하기 위해 신규채용을 줄여 인원을 감축하는 기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기업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책임이다.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업의 투자의욕을 북돋는 획기적인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 전경련을 중심으로 정부와 정치권에 강력한 기업투자활성화정책을 요구해야 한다.

전경련이 주도하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위한 농민단체와의 만남도 많은 기대를 얻고 있다. 정치권이 농민표를 의식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에 우리나라는 국제무역시장에서 외톨이로 왕따를 당하고 있다. 전경련이 나서서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불법선거자금 문제는 이회창 후보측이 국민에 사과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직을 내놓을 각오까지 밝히고 있다. 전경련도 정치자금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는 강력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또한 야당 총무들이 선거공영제의 전면 실시를 합의하고 나섰다. 불법 정치자금의 수요가 없다면 이제 더 이상 기업 비자금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그동안 발생한 비정상적 회계처리는 전면 공개하고 이를 일제히 정리한 다음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검찰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기업 스스로가 정리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깨끗한 경제계를 이끌어 갈 전경련의 수장으로는 가장 깨끗한 기업가 또는 경제인이 추대돼야 한다. 하루 빨리 회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가장 존경받는 인사를 찾아내 신임 회장의 주도하에 깨끗한 기업환경 조성에 앞장서 나가야 한다. 전경련이 부자들의 밥그릇만 지킨다는 절망의 오명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희망의 단체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이 만 우 고려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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