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시인을 꿈꾸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영화에 대한 열정도 뜨거웠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2년 여 영화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시를 썼다. 그렇게 쓴 시를 고국에 보낸 것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결국 시를 써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에 이르면 운명으로 여겨지는 것에 순응하고 싶다. 짐을 꾸려 고국으로 돌아와 그는 시인이 됐다.이병률(36)씨가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하고도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 발행)를 내기까지는 8년이 걸렸다. 시집 내는 게 왜 그리 늦어졌냐고 묻자 그는 "일찍 낼 운명이 아니었던 듯 싶다"고 순하게 말했다. "시를 잘 쓰라고 주어진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시간 동안 내 시는 깎고 깎여 둥근 모양이 됐다."
깎이기 전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무엇이었냐고 다시 물었다. "등단했을 때 내 시는 함께 나누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통할 수 없었다. 알려고 들면 들수록 난해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최하림 시인이 쓴 해설 중 '그는 우리에게 정체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좀처럼 해독되지 않는다. 신경을 모두어 한 행 한 행 읽어나가야 한다'는 몇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발을 씻는다, 혼자 발을 씻은 지도 오래되었다/ 나의 애인은 키가 컸다/ 그러고 보니 발을 다 묻지 않았다/ 누군가 애인의 부음을 듣고 찾아와 울었다 해도/ 묻히지 않은 발을 땅 속으로 밀어넣지 않기를 바랄 뿐/ 수건으로 발을 닦는다/ 한 발은 애인의 것이고 한 발은 나의 것이다/ 발을 모은다/ 발을 모으고 통곡을 한다'('크고 오래된 나무'에서) 사람을 사랑했고 홀로 됐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이, 삶이 남았다.
'오래된 사원' '가슴을 쓸다' '공기' 등을 특별히 마음에 둔 시로 골라주면서 이병률씨는 "내 시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족들에게 시집을 보여줬다.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내가 가족들한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시로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쉽게 풀려지지 않는 얘기를 매우 조용하게 들려준다. 마종기 시인의 말처럼 그 노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또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슴 저린 울림이다.
병실에 누워 의사를 만나고 쓴 '공기'의 몇 구절에서도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난다. '감정의 속닥거림에 취했었나 링거 바늘을 타고 들어오는 광기의 헛것들을 들이마시느라 잠 못 든, 날 찾아온 그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실의 마비였다 사는 일이 곤한 일인 줄 모르게 나는 다녔고, 그대도 곤한 줄 모른 채 이역 멀리서 물결이 무늬를 더듬듯 살고 있었다'('공기'에서) 그 '사람' 안에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된,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놓아둔다. '오고 있는 것은 없고/ 지나가는 것도 없습니다/ 헌데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합니다'('소식'에서)
한때 화가를 꿈꾸었으며 영화의 꿈을 접은 뒤에도 이미지에 대한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는 사진에 몰두하고 있으며, 최근 아베 피에르 신부의 어록 '피에르 신부의 고백'에 자신이 찍은 사진을 실었다. 곧 사진집도 낼 참이다. 그가 꿈꿔온 모든 예술에 공통된 것이 담겨 있는가 물었다. 그는 "사람과 온기가 있다"고 답했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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