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를 사지로 몰아넣는 탄압도구인가, 사용자의 유일한 방어수단인가.'노동계의 동투(冬鬪)가 심상치 않다. 최근 잇달아 발생한 노동자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민주노총이 6일과 12일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하는 등 노·정, 노·사 관계가 살얼음판이다. 특히 한진중공업노조 김주익 위원장의 자살에 대해 노동계는 파업 등 노조활동과 관련해 제기된 손해배상청구 및 가압류에 강한 혐의를 두며 '타살'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천문학적 액수의 손배·가압류
노조를 대상으로 제기된 손배·가압류 액수는 천문학적이다. 민주노총이 지난달 29일 집계한 현황에 따르면 노조 및 노조원에 제기된 손배·가압류는 46개 사업장에서 1,481억7,000만원에 달한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외환위기 이후 손배·가압류가 급증했다"며 "노조와 노조원이 재정적으로 취약한 점을 악용, 사용자측이 노조활동을 무력화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동계는 사용자측이 임·단협 등 노조와의 교섭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해 손배·가압류를 악용하고 있다는 근거로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임·단협 타결과 더불어 손배·가압류가 취하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배달호씨 분신 자살 이후 손배·가압류 문제를 노동 정책의 최대 이슈로 부각시킨 두산중공업 노사도 분규 타결과 함께 손배가압류 철회에 합의했다. 한진중공업도 1991년 7,200여만원의 손배·가압류 청구를 시작으로 현재 노조 조합비 및 노조간부의 부동산 및 임금 등에 7억4,000여만원의 가압류를 걸어놓기까지 총 6차례에 걸쳐 손배·가압류 청구와 철회를 되풀이했다. 지난해 파업을 벌인 발전노조의 경우도 조기복귀한 조합원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가압류가 해제됐다.
최근에는 손배·가압류의 대상이 노조 또는 파업을 주동한 노조간부에 국한되지 않고 노조원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 새로운 경향이다. 노조와 노조간부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하고 조합비를 가압류하는 데에서 나아가 노조원의 임금, 통장, 부동산, 심지어는 신원보증인의 재산까지 가압류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노동탄압 수단? 불법파업 대응책?
노동계는 손배·가압류를 "새로운 노동탄압도구이자 노동자연좌제"라고 규정, 파업 등의 노조 활동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경제적 피해에 대한 책임 면제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재계는 "노조의 불법파업에 사측이 합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며 손배·가압류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손배·가압류가 급증한다는 것은 곧 불법 파업이 많다는 것을 반증한다"며 "불법 파업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손배·가압류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권기홍 노동부 장관 등 노동관계 장관들이 대국민담화를 통해 손배·가압류 관련 법·제도 개선을 약속하자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재계는 일제히 반대입장을 밝혔다.
정부부터 손배·가압류 해결해야
손배·가압류에 관한한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정부의 손배·가압류 개선 대책을 불신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제도 개선을 약속한 정부가 오히려 파업을 벌인 철도노조를 상대로 75억여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철도노조, 발전노조, 서울·인천지하철노조, 장은증권노조 등 5개 사업장에 394억7,000만원의 손배·가압류가 걸려있는 등 공공부문이 전체 손배·가압류 규모의 26.7%를 차지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언제 실현될지 장담할 수 없는 법개정보다는 정부부터 노조에 가한 손배·가압류를 일괄 철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 법적 절차
당사자들에게 초래되는 엄청난 결과에 비해 법원의 가압류 결정은 너무나 손쉬운 절차를 통해 진행된다. 가압류 사건은 재판절차가 필요 없는 '비송 사건'이다. '소송'이 아닌 '신청'이기 때문에 민사 신청 사건을 담당하는 판사들이 신청인측에서 제출하는 자료만을 근거로 도장을 찍어 내려보내면 그대로 결정되는 것이다. 한 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법원에 또 가압류 신청을 낼 수 있다. 신청인측의 소명이 부족할 경우 소명자료를 보완해 다시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정도가 가압류 사건에서 진행되는 '심리절차'다. 법원은 이에 대해 "가압류는 본안 손해배상 사건의 사전 준비절차로서 신청인측에서 본안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채 일정 기한이 지나면 자동 해제되기 때문에 절차가 까다롭지 않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노동자를 상대로 제기되는 가압류는 대부분 손해배상 소송으로까지 연결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법원에서 받아들인 노조 가압류에는 조합 간부들의 임금에 대한 가압류(대우전자 기아자동차 사건 등), 노조간부 자동차 가압류(동산의료원 사건), 신원보증인 재산에 대한 가압류(현대자동차 사건), 노조조합비 전액 가압류(동산의료원 사건) 등을 필두로 수없이 많지만, 민사책임이 종국적으로 집행된 것은 진성전자 사건과 동산의료원, 지하철 파업 사건 정도다. 복직포기 등을 조건으로 사측이 소송을 취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동자나 노조가 다른 방향으로 양보를 한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법원은 불법파업에 따른 손해에 대해서는 노조측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전제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으며, 판결은 실제 손해가 발생했는지를 중점적으로 검토해 내려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범위까지를 파업에 따른 손해액에 포함시키느냐는 담당 재판부의 시각에 달려있다. 동산의료원 사건에서 법원은 사용자의 쟁의행위 유발책임 등을 주장하는 노조측의 손배 책임 감경 사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서울지법은 2001년 서울시지하철공사가 노조와 노조원 68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노조에 15억1,0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판결, 사용자측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그러나 지난달 서울지법은 한국동서발전(주)이 지난해 파업과 관련, 한국발전산업노조(발전노조)를 상대로 낸 31억6,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파업 수습을 위한 광고료, 재파업에 대비하기 위한 계약직 인력의 인건비 등은 "회사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며 파업에 따른 손해액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 법원은 최근 근로자에 대한 가압류에 대해 보다 충실한 심리를 하겠다고 밝혀, 실제 사용자에게 치우쳤던 가압류와 손배소송의 결과가 바뀔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손배·가압류 개선방안
노조의 불법 파업으로 인해 회사측이 손해를 입은 경우 이에 대한 손해배상 및 가압류 청구는 사용자의 정당한 권리이므로 막을 방법이 없다. 하지만 정부는 노조에 대한 손배·가압류의 남용과 이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노동부는 9월 발표한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을 통해 노조 및 노조원에 대한 가압류 청구의 상한 설정 노조활동 관련 신원보증인의 책임 면제 등을 내용으로 법 개정안의 마련을 준비중이다.
우선 민사집행법을 개정, 근로자의 생계 유지와 기본적인 노조 활동이 가능하도록 근로자의 임금 등 급여와 노조비에 대한 가압류 범위를 제한할 방침이다. 현행 민사집행법은 임금 등 급여채권에 대해서는 2분의 1 이상을 가압류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으나 임금의 50%가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 근로자들은 가압류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 따라서 노동부는 임금 등 급여에 대한 가압류 범위를 최저임금 또는 최저생계비가 보장되는 수준으로 제한하고, 특례 조항을 둬 노조 조합비에 대한 가압류에도 상한선을 정할 방침이다. 또한 노조활동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서는 신원보증인에게까지 책임을 묻지 않도록 신원보증인법도 고칠 방침이다.
오세훈(한나라당) 의원 등도 정부의 노사관계 로드맵과 일치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5월 발의해 현재 국회 법사위에 계류중이다. 임금에 대한 가압류는 최저임금을 보장하고(민사집행법) 강도죄, 절도죄, 사기죄, 횡령죄, 배임죄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만 신원보증인에게 손배 책임을 묻도록(신원보증인법) 하자는 내용을 담고있다.
정부는 노사관계 로드맵에 대한 노·사·정 의견 수렴을 거친 뒤 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나 국회에 법안이 계류 중이기 때문에 이보다 앞당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법무부와 법사위가 신원보증인법 개정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데다 노동계는 노동관계법에 노조활동과 관련한 손배·가압류 문제 개선 대책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입법은 수월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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