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째 고아 우려내는 짓이 투박스럽고 거칠기는 하지만 소라는 짐승의 맛을 이보다 더 한꺼번에 느끼는 방법은 달리 없다. 한때 이름난 설렁탕 집이 서울에 몇 군데 있었다. 이문옥 대창옥 사동옥 이남옥 대성관 등을 들 수 있다. …옛날의 설렁탕 집에서는 소 한 마리에서 우피와 오물만을 제해 놓고 큰 가마솥에 넣어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끓인다.' 지금은 타계한 서울토박이 언론인 조풍연이 쓴 수필 서울설렁탕의 일부다.설렁탕은 이렇듯 민족의 지혜가 담긴 음식이다. 서울의 토속음식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사골과 양지머리뿐 아니라 소의 모든 부위를 넣어 우려내기 때문에 국물이 뽀얗고 맛이 농우해 설농탕(雪濃湯)이라고도 한다.
종로구 공평동, 옛 화신백화점 옆 골목의 이문설농탕은 그런 맛을 간직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구수한 냄새가 입맛을 자극한다. 큼직한 뚝배기에 담긴 국물에는 한 세기에 가까운 오랜 세월이 빚어낸 전통의 맛도 녹아 있다. 이문(里門)이란 옥호는 동네 이름이다. 공평동은 순화궁의 이문이 있어 조선 말까지 이문안이라고 불리던 마을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문은 도둑을 지키는 문으로 보통 마을 어귀에 세워졌다.
이문설농탕의 주인은 전성근(田聖根·58)씨. 40년 넘게 주방을 지켜온 전씨의 어머니 유원석(柳元石)씨는 지난해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씨는 60년 두 번째 주인으로부터 이 식당을 인수했다. 주인의 누나가 유씨와 진남포고녀 동기로 다리를 놓았다. 세계적인 음악가족 정트리오(정명훈 경화 명화)의 어머니 이원숙씨와 이화여전(이화여대의 전신) 가사과 동기인 유씨는 50년대 부산에서 이씨와 동업으로 한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문설농탕의 창업연도는 1902년부터 1907년까지 여러 갈래다. 전씨는 일단 창업연도를 1907년으로 정하고 100주년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 해로 정한 까닭은 일제강점기 경복궁 주위에 있던 경기 배재 중앙 휘문고보를 다닌 노인들의 기억에 따른 것이다. 그들에게 이 집 설렁탕은 학창시절의 추억이 어린 음식인 것이다.
건국대 농대를 나온 전씨는 삼 형제중 장남으로 경기 화성에서 부친과 함께 목장을 했다. 지금은 그만 두었지만 목장이야말로 가업이었다. 할아버지(田熙哲)는 목원대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원 초대교장을 역임한 목회자로 목장을 일구었다.
전씨는 81년부터 어머니를 돕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잠시'라는 단서를 달고 식당에 나왔다. 하지만 "이 집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음식점일 거야."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변화가 일었다.
"어머니는 옛날의 맛을 유지하려고 무척 애쓰셨습니다. 지금은 도시가스를 사용하지만 80년대 초만 해도 하루 연탄 100장을 때서 설렁탕을 끓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이 집의 국물은 진하면서도 담백하다는 것이 손님들의 평이다. 국물이 얼마나 진하면 놋숟가락이 국물로 인해 휠 정도라는 말까지 떠돌았을까.
주방에는 500인분의 압력솥, 380인분의 가마솥, 뚝배기를 담아 놓는 또 다른 가마솥이 나란히 설치돼 있다. 설렁탕은 압력솥에서 15시간 정도 푹 곤 다음 가마솥에 옮겨진다. 주방장 황영상씨와 김영일씨가 맛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하루 평균 사골은 30kg, 고기는 200kg 정도 소비한다. 고기와 뼈를 고면서 걷어내는 기름만 18리터나 된다. 기름은 모두 비누공장에서 가져간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반 백년을 거래한 단골손님들이 많다. 90세를 넘긴 손님도 있다. 지금은 타계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김두한도 단골이었다. 김두한은 10대 시절 한동안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80년대 국가대표, 특히 유도 복싱 레슬링 등 체급경기 선수들은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당시 유도대표선수들은 YMCA 체육관에서 연습을 했다. 유도선수들과의 인연이 복싱 레슬링 대표선수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전씨는 82년 이들을 중심으로 '이문회'를 만들었다. 유도의 하형주, 복싱의 김광선 문성길 신준섭 등이 회원이었다. 한창 먹성이 좋은 대표선수들은 전씨를 친형처럼 따랐다.
70, 80년대 한 때 설렁탕 국물을 뽀얗게 하기 위해 분유나 프림 등을 섞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제로 그런 집도 있었다. 그 바람에 많은 설렁탕집들이 적지 않은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런 때에도 이문설농탕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음식을 엉터리로 만들면 손님이 먼저 알아차립니다. 우리 집은 값도 마음대로 올리지 않습니다. 일단 단골손님들에게 의향을 물어봅니다." 설렁탕 보통 한 그릇 값은 5,000원. 설렁탕 외에 도가니탕도 있고 부드러운 수육은 안주감으로 제격이다. NHK와 후지TV 등 일본의 언론매체가 특집으로 다루면서 10여년 전부터 일본인도 많이 찾는다. 아침 손님은 오히려 일본인들이 더 많다.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만족에 있다. 만족은 맛에서 나온다. 이문설농탕을 찾는 사람들은 전통의 맛이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 설렁탕의 유래
설렁탕은 서울을 대표하는 음식은 아니다. 서울의 토속음식이다. 설렁탕이 언제부터 서울의 토속음식으로 자리를 잡았을까. 명확한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 왕이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친경례(親耕禮)를 하면서 60세 이상의 노인에게 곰국을 대접하면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한국요리문화사·이성우).
조선시대 왕은 매년 경칩이 지난 뒤 첫 해일(亥日·돼지날)에 동대문 밖 동적전에서 친경을 했다. 적전(籍田)은 왕이 농민을 두고 경작하던 농토인데 선농단은 동적전에 있었다.
왕의 친경은 영조 때 간행된 친경의궤(親耕儀軌)에 그 내용이 자세히 전한다. 왕은 청색 또는 흑색의 옷을 입힌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간다. 친경례에 참석한 백성들은 일이 끝난 뒤 왕에게 네 번의 절을 올린다. 왕은 수고한 백성에게 석잔의 술과 음식을 내려준다. 술은 막걸리였고 음식은 설렁탕이었다.
설렁탕은 현장에서 쟁기질 하던 소를 잡아 끓인 것이 아니다. 소를 마구 잡는 법이 아닌데다 설렁탕은 국물이 제대로 우러나오려면 하루는 족히 끓여야 하기 때문이다. 설렁탕의 재료는 반촌(泮村)의 반인들이 댔다. 성균관 인근의 동네가 반촌으로 여기에 살던 사람을 반인이라고 칭했다. 반인은 조선시대 서울지역에 쇠고기를 독점판매하는 시전의 하나인 현방(縣房)을 장악하고 있었다.
현방은 일종의 다림방(푸줏간)으로 소를 매달아 팔아서 그렇게 불렸다. 현방은 성균관의 전복(典僕)들이 운영했으며 이들을 도사(屠肆)라고도 했다. 전복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인데 고려시대 유학자 안향이 기증한 노비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성균관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비복청이나 허드렛일을 돌봐주는 수복청에서 근무했다. 그러한 대가로 도살과 쇠고기 판매권리를 부여받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농사의 근본이 되는 소의 도살이 엄격히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전복들에게는 엄청난 특권이 주어졌던 셈이다. 조선 후기 서울에는 전복의 현방을 포함, 모두 23개의 다림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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