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줄근한 추리닝과 라면, 무협지는 오랫동안 ‘백수’의 벗이었다. 무협은 어디서든 B급 문화, 하위 문화에 속했다. 때로 미국의 B급 영화 상영관에서 브루스 리의 무술영화가 상영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컬트 문화의 상징, 혹은 일부 마니아의 전유물이었다.그러던 무협의 지위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와호장룡’이 무협영화를 ‘아트’ 영화 영역으로 이끈 데 이어 ‘매트릭스’ 시리즈는 동양 무협을 블록버스터의 묘약으로 바꾸었다.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무협영화를 만들고, ‘죽음의 다섯 손가락’ 등으로 무협 영화 팬들의 기억에 생생한 무술 영화감독 정창화의 팬이기도 한 쿠엔틴 타란티노는 신작 ‘킬 빌’에서 아예 이소룡과 중국 무협, 일본 사무라이 액션을 닥치는 대로 끌어 들였다.
무협은 이제 B급 문화의 상징이 아니라 주류 문화의 새로운 흥행 아이콘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물론 그 한 가운데에는 요절함으로써 신화의 정점에 선 브루스 리(李小龍ㆍ1940~1973)가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묘약 아시아 액션
매트릭스의 제작자 조엘 실버는 영화의 성공 비결로 “이전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가상 공간의 설정과 홍콩 액션”을 비결로 꼽았다. 그의 말대로 ‘매트릭스’는 최첨단 촬영 기술을 통해 컬트 문화의 상징이던 홍콩 액션을 이 시대의 새로운 문화코드로 끌어올렸다.
“신선한 피를 맛보고 싶다”고 외쳐온 ‘헤모글로빈의 시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핏빛 무협극 ‘킬빌’에서 브루스 리가 ‘사망유희’에서 입었던 노란색 추리닝을 입은 여주인공 브라이드(우마 서먼)를 등장시켜 홍콩 쿵후, 일본 닌자 액션 등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 타란티노 감독은 어린시절부터 LA 오렌지카운티 남부의 재개봉관에서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 세례를 받고 자란 아시아 영화 키드.
여성을 복수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자체가 홍콩 무술 영화의 복수극 원형에 따른 것이다. 두 편으로 나누어 개봉하는 ‘킬 빌’은 11월21일 개봉하는 1편에서는 일본 액션 배우 소니 치바로 상징되는 일본 액션을, 내년 개봉할 2편에서 소림무술을 마스터한 유가휘의 중국 무술을 선보인다.
충무로의 새로운 코드 '이소룡'
충무로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소룡’을 추억한다.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는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78년 서울 말죽거리를 배경으로 한 학원 무협물. 폭력적 세상의 축소판이던 고교에서 학생들의 탈출구는 이소룡의 영화와 쌍절곤, 그리고 그의 괴조음이었다. 영화는 ‘이소룡 키드’의 활극을 통해 현실도피적 판타지를 펼친다.
90년대 초 충무로에 로맨틱 코미디 영화 바람을 일으킨 신씨네의 신철 사장은 브루스 리를 디지털로 살려낸 영화를 만들기 위해 미국에 머물며 유족들과 판권 협의를 마쳤다. 도시 무협극을 표방한 ‘아라한 장풍대작전’(감독 류승완)은 이소룡 영화의 정신, 즉 하늘을 붕붕 나는 와이어 액션 대신 ‘수련과 내공’을 통한 정통 무술에 무게를 둔다. 영화는 수련을 통해 ‘아라치’(득도한 사내)로 거듭나려는 평범한 교통 순경(류승범)의 몸부림을 그린다.
무협소설과 무협만화가 만화대여점을 통해, 또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고정팬을 확보하긴 했지만 전성기를 지난 감이 없지 않았던 무협이 충무로와 할리우드에서 또 다른 표현 양식인 영화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허무주의의 부정적 표출’이라는 문학평론가 고 김현의 해석에서, ‘서양 판타지에 맞선 아시아 판타지의 복권’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해석 공간에서 새로운 논의가 이뤄질 시점이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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