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눈썹에 커다란 코와 꽉다문 입술. 그의 첫인상은 그리 호감을 주지 못했다. 도리어 우락부락한 모습이 산적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커다란 몸집의 그가 어린애들과 어울려 논다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전쟁이 막 끝난 1954년 어느날, 서울 효창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해리 홀트(1964년 작고)의 첫인상은 이런 정도였다. 나중에 고아들의 아버지로까지 칭송 받은 그였지만 첫인상은 어색했던 첫 대화와 함께 썩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그를 찾아간 것은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형제(브레드린)교단에 몸담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어느날 교회를 통해 나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내온 것이다. 전쟁고아 입양을 위해 한국으로 떠난 아들을 돌봐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의 편지였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아들을 부탁하는 어머니의 정성 때문에라도 그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말을 건네자 "기도로나 도와달라"는 쌀쌀 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귀찮다는 투였다. 당시 어마어마한 돈을 들고 들어온 홀트 주변에는 돈을 보고 몰려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도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다.
홀트는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에서 목재공장과 농장으로 큰 돈을 번 사업가였다. 백만장자가 된 그는 쉰 살이 되는 해에 은퇴해 유람생활로 만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병에 결려 꿈이 무산된 것은 물론 목숨까지 위태로울 지경이 됐다. 그는 한국으로 오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면서 당시 심경을 이렇게 들려줬다. "병석에 누워 곰곰이 지난 날을 회고해 보니 부끄러운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겁니다. 죽어서 하느님 앞에 끌려가 '일생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평생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먹여살렸습니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살려주시면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살다 오겠습니다'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더니 정말 기적처럼 살아난 겁니다."
죽다 살아난 홀트를 한국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는 기록영화 한 편이었다. 국제 구호단체인 선명회(현 월드비전)를 세운 밥 피어스 목사가 한국 전쟁고아들의 참상을 담은 영상물이었는데 한강에 버려진 채 살아가는 전쟁고아와 혼혈아들의 비참한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홀트는 그 영상물을 보고 비로소 하느님이 자신을 되살려준 이유를 깨달았다고 했다.
홀트는 그 길로 한국으로 건너와 8명의 혼혈 전쟁고아를 입양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이들을 안고 미국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한 그를 수많은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미 7명의 자식이 있었던 홀트가 또다시 8명의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은 당시 미국에서 큰 뉴스거리였던 것이다.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어떻게 하면 입양을 할 있느냐"고 묻는 수백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래서 홀트는 한국의 고아들을 미국가정에 연결해 주자는 결심을 하고 전재산을 처분해 한국으로 건너오게 됐다.
홀트와 그렇게 처음 만난 뒤 잊고 살았는데 3년쯤 지난 어느날 홀트 쪽에서 연락이 왔다. 심하게 앓아 누웠다는 전갈이었다. 당시 홀트는 녹번동으로 옮겨 해외입양사무소와 고아원을 함께 열고 있었다. 3년 만에 찾아간 나를 홀트는 반갑게 맞았다. 침대에 누워 있다 몸을 일으킨 홀트는 갑자기 닭 이야기를 꺼냈다. "닭들은 물 한 모금 먹고 하늘을 쳐다보며 꼬꼬댁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데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이 이제는 하늘을 쳐다보며 기도만 하라는 뜻으로 나를 이렇게 눕혀 놓으신 것 같습니다"며 웃었다. 침대를 빠져 나온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나를 고아원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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