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손호철의 정치논평]죽어야 바뀌는 사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손호철의 정치논평]죽어야 바뀌는 사회?

입력
2003.11.04 00:00
0 0

1980년대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이었던 한 운동가가 얼마 전 우리 민주화운동에 내재한 폭력성에 대한 자성을 촉구한 바 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한국 민주화운동의 특징은 비폭력성이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 민주화운동은 테러나 게릴라전과 같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의 순간에 저항의 수단으로 분신과 같은 자결을 택했다. 특히 광주의 비극에 따라 80년대 초 한 차례 자결의 폭풍이 불었고 노태우정권 시절인 91년 공안정국에 저항해 또 한 차례 분신의 파도가 인 바 있다.이후 잠잠했던 자결의 물결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특히 이번의 특징은 모두가 노동자라는 점이다. 올 들어 5명의 노동자, 최근 한달 동안 3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던졌다. 또 노조위원장이 자결한 한진중공업에서 다시 동료가 죽어 진상조사 중인데, 자결일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대기업중심의 노동운동계층을 노동귀족이라고 공격하며, 이들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같은 열악한 다수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나가겠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죽은 노동자는 재벌기업,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가 각각 한 명으로, 대기업 노동자로부터 비정규직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노동자들이 정부의 노동정책에 죽음으로 저항하고 있다. 야구에서 선수가 한 게임에 1루타에서 홈런까지 모든 종류의 타격을 하면 그것을 사이클링 히트라고 한다. 노무현 정부도 대기업,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를 망라하는 일종의 '노동열사 자결 사이클링 히트'라는 치욕적 대기록을 낸 셈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노무현 정부는 문제가 되고 있는 불법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조만간 제도적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손해배상 가압류 시 최저임금은 보장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언 발에 오줌누기식의 미봉책으로 오히려 노동계를 자극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사업장 중 정부기업의 수는 11%지만 손해배상 가압류액은 27%에 달해 정부가 일반기업보다 손해배상 청구를 더 남용하고 있는 바, 이를 해제하지 않으면서 문제해결을 약속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비판이다.

노 대통령의 정신적 고향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회는 불법파업을 너무 넓게 규정하고 이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우리 노동법의 반민주성에 문제의 근원이 있다며 손해배상 청구를 폭력에 의한 피해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이 파업을 현재의 절반수준으로 줄이겠다고 공언하면서 정부는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합원 과반수이상의 찬성으로 되어있는 파업요건을 조합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개악해 파업을 어렵게 하겠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도 비정규직을 제도화하는 파견근무제 허용업종을 오히려 대폭 확대하려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노동자들 보고 자결을 하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에는 세가지 종류의 사회가 있다. 자결과 같은 극단적 저항을 택하지 않더라도 사회문제가 터지면 이를 고치는 사회, 자결을 하고 사람이 죽어야 무언가 바뀌는 사회, 사람이 죽어도 바뀌지 않는 사회라는 세 가지 종류이다.

노동자 입장에서 볼 때, 노무현 정부하의 한국이 첫 번째 종류의 사회가 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갔고 잘해야 두 번째 유형의 사회(죽어야 바뀌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간의 행적을 볼 때 정작 우려되는 것은, 두번째 유형도 못되고 세번째 유형의 사회가 될 것 같다는 사실이다. 아니, 더 나아가, 죽으면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는 사회, 즉 죽어봐야 개혁은커녕 개악이 되는 사회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안타까운 일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